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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삶은 더불어서

작가(강민경)_조치원 도시재생 청년서포터즈6기

어릴 적, 도시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깍쟁이’ 같았다. 사람의 정보다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건물의 위상이 먼저 보였고, 모든 것이 획으로 나누어진 네모 상자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도시는 쌀쌀하고 정 없는 장소이자, 사람이 마음을 푹 놓고 살 수 없는 곳이라 여겼다. 도시의 발전 또한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살기보다는 혼자서 외롭고 쓸쓸히 살아가거나 매일 같이 차려진 옷을 입고 일의 무게를 어깨에 얹고서 스스로 외로움을 이겨내는 삶들이 그 발전을 이룩한다고 생각했다. 도시는 늘 쌀쌀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사람의 정과는 먼 곳이라 여겨졌다.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의 이미지가 익숙해지면서 이제 하나의 도시는 누군가의 터전이자 고향이 되었다. 논밭을 갈아 농작물을 길러내듯, 도시에서도 우리의 삶은 길러지고 또 성장하여 수확된다. 이제는 누군가의 고향이 도시이기도 하고, 삶의 터전임과 동시에 일상의 흔한 배경이 되었다. 자연보다는 다수의 건물이 익숙해졌고, 1차 산업이 주였던 시절에서는 훨씬 벗어나 2, 3차 산업이 생활의 중심이 되었고 이제는 4차 산업이 도시의 주요 서비스와 문화 수준을 결정한다. 그만큼 아주 예전에는 번쩍번쩍하던 누군가의 도시가 이제는 빛바래져 버린 경우도 허다해졌다. 도시가 빛을 잃었다는 건 그만큼 사람이 오고 가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나 도시는 사람이 없으면 활기를 잃고, 존재의 의미를 잃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필요한 산업이 달라졌듯, 요구되는 도시의 역할과 문화 그리고 서비스도 급격히 달라졌다. 그것들이 충족되지 못하면 사람은 살던 도시를 떠나게 된다. 사람이 사는 곳, 그곳이 어디든 사람의 정이 있어야 한다. 건물이 목적이 아닌 사람이, 역사와 향수가 아닌 현재의 사람이 목적이어야 도시가 살아난다.      

광역시의 한 도시를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와서 오래 살았다. 예전에 살던 광역시의 그곳은 새로 건물들이 지어지고, 한참 개발 중인 곳도 있어서 내 나름대로는 꽤 멋진 도시로 기억에 남아있었다. 특히 버스를 타고 멋쟁이 동네로 알려진 그 도시 중심부에 가면 거리에 사람이 즐비하고 이것저것 파는 것들도 많아 눈이 빙빙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세련된 도시라고 늘 생각해왔다. 그 후 고향에 들르듯 오랜만에 다시 가 본 그 도시는 내 추억과는 조금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특히 어렸을 적 선망했던 그 도시 중심부 거리는 휑했다. 내가 기억했던 것과는 다르게 오고 가는 사람은 적었고, 몇몇 건물은 노후화되어 있었다. 사람이 오가지 않으니 가게들의 분위기도 썰렁했다. 서울에 꽤 오래 살게 되면서 서울의 빌딩 숲이 눈에 더 익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시간이 많이 지나고,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도시는 쓸쓸해 보였다. 아니 쓸쓸했다.     

역시 도시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래 살아 익숙한 삶의 터전의 추억만으로 살 수는 없다. 먹고사는 걱정을 해소할 수 있고, 쓸쓸하지 않은 곳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혼자 사색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야 하고, 안락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주거형태가 있어야 하며, 먹을거리와 즐길거리를 가까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스스로 와서 살아가며 마을이 되고 도시가 되는 형태는 이제 옛날이야기다. 살 수 있는 곳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려면 마음이 끌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즐거운, 무엇보다 의식주가 간단히 해결될 수 있어야 도시가 살아난다. 도시재생은 그러한 차원에서 한번쯤 우리가 깊이 생각해볼 만한 거리다.      


“새로운 방에 들어가는 것을 늘 모험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 거리 헤매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새로운 방처럼 도시 또한 진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모험의 장소이다. 특히나 도시재생을 통해 새로 만들어진 ‘도시’라면 더더욱 기존의 도시에서의 이미지와 새로 만들어진 도시 내부에 자리 잡은 사회적 목표가 무엇인지가 스며들어있기 마련이다. 낯설지 않은 이름이지만 눈에는 새로운 ‘도시’ 그곳이 삶의 터전이 된다는 건 모험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그 도시에 익숙한 사람도 이제 그 도시의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도.     


조치원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관련한 에세이 작업을 의뢰받았을 때 ‘모험’이란 단어가 떠오른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직접 살아본 건 아니지만 ‘조치원’이라는 이름 자체가 익숙했기에 궁금해졌다. 기존에 쭉 이어져오던 조치원의 역사와 사람들의 인식과 그만의 특징이 농축되어 스며든 그 기운이 어떻게 재탄생될까? 누군가에게는 고향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휴게소 이름이고 누군가에게는 기차역으로 익숙할 그곳이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선보일지 그리고 그 가치는 겹겹이 쌓여 어떤 형태가 될지 궁금해졌다. 특히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가치를 지켜나가면서 새로운 도시 환경을 만들어낸다는 ‘도시재생 뉴딜사업’이란 것은 더욱.     


사람이 사는 곳을 개발한다는 건 큰 의미를 가진다. 그렇지만 말의 의미로만 끝나는 재생은 재생이 아닌 상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미흡하게 말 뿐인 재생은 그에 미쳤던 기대에서 떨어지는 실망을 낳고, 도시의 쇠퇴 경험을 또 한 번 겪게 한다. 사람이 체감할 수 있어야 진정한 도시의 재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계획은 보다 편하게 기대감을 가질 수 있겠다. 보다 사는 사람의 곁에 있는 지자체가 주도하면서 사는 사람이 체감할 수 있는 편의시설을 만들어나가는 것, 사는 사람들의 역량을 길러 복합적으로는 도시기능을 더 높인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진정한 재생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집을 얻고, 심리적으로 편안하며, ‘나 여기 살아, 여기로 이사 오는 걸 추천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고,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스스로 높일 수 있는, 그런 도시의 재생이야 말로 도시의 진정한 재탄생이 되리라.      


나에게 조치원은 세종시 어느 곳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다. 사실 도시라기보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마을, 읍내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우리 엄마 아빠의 고향처럼 도시의 곳곳에는 세련된 건물보다는 낡은 건물이 즐비할 것이라는 편견도 있었다. 그런 곳이 어떻게 재생이 될지,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그리고 조치원이 가진 스토리와 문화가 이어질 수 있을지 에세이를 쓰기 위해 자료를 살펴보면서 궁금해졌다. 조치원 지역의 공동체 문화는 어떻게 계승될 수 있을까? 마을의 주체가 주민이 된다는 것, 그 의미를 새로운 도시 재생이 가시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조치원에 살지 않는 사람이 생각하는 조치원의 이미지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거점’ ‘안락한 휴식의 쉼터’의 문화의 요소가 잘 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 조치원에 사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혹은 지겹기까지 한 이미지일 수도 있겠으나, 조치원을 힐링의 쉼터로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긍정적인 각인도 없을 테니까. 더불어서 조치원에 사는 주민들이 더욱 자신의 삶의 터전을 사랑하게끔 만들 수 있는 도시재생이 이뤄졌으면 한다. 도시의 격차가 없어질 수 있는 선에서 조치원에서 성장하고 동력을 만들어내는 힘이 자연적으로 순환되는 역할이 아마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목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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