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조치원, 다시 걸어보다

작가(두근거림)_조치원 도시재생 청년 서포터즈 6기

핸드폰에서 여느 때와 다른 진동이 울렸다. 다음 브런치에서 온 알림이라는 걸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고도 단숨에 직감할 수 있었다. 도착한 메일에는 조치원 도시재생 서포터즈 6기 활동 참여에 대한 제안이 담겨 있었다.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5기 서포터즈 활동에 참여하며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위해 방문했던 작년 겨울의 조치원 경관은 그제의 기억처럼 생생하다. 2만보를 넘게 걸으며 묻어두었던, 서른세 살의 하루를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설레는 마음 또한 자연스레 들었다.       


작가들을 위한 OT까지 마치고 나니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지난 글의 주제가 "조치원 두루 살펴보기" 였다면 이번에는 보다 특색 있는 주제로 정하고 싶었다. 가령 조치원 전통시장에 하루 종일 머물며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한다든지, 조치원의 걷고 싶은 길을 소개한다든지, 한 명의 청년으로서 조치원의 문제점을 관찰한다든지 와 같은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중에서 첫 번째로 확정한 아이디어는 평일의 조치원을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지난 방문은 일요일에 이루어졌기에 주요 상권이나 거리의 특성이 ‘주말적’이었다면 이번에는 평일, 태양이 가장 뜨거운 정오의 조치원을 두 눈에 담아보고 싶었다.   

  

두 번째 아이디어는 6기 서포터즈들이 SNS에 올린 글을 참고하였다. 활동을 주차별로 꾸준히 올려 구체화되어가는 아이디어를 확인할 수 있는 그룹도 있었고, 활동 자료가 아직 덜 올라와 어떤 아이디어를 계획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그룹도 있었다. 이처럼 진행 시기나 과정, 계획은 저마다 달랐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문제점으로부터 활동이 시작된다는 점이었다. 아이디어는 문제점을 꼬집으며 나오게 된다. 변화가 기존의 토대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전통시장의 접근성을 높여 청년층의 유입을 증가시키기 위한, 제주 올레길처럼 걷기 좋은 거리를 구성하여 관광객의 방문을 늘리기 위한, 지역 화폐 여민전의 홍보를 늘려 주민들의 사용을 높이기 위한 아이디어는 현재의 시장, 거리, 지역 화폐 활용에 대한 문제점에서 출발한다.       

    

6기 서포터즈 청년들과 다르게 나는 조치원의 현안을 몇 주에 걸쳐 깊게 다루기 어렵고, 함께 논의할 수 있는 동료가 없다. 그들과 같은 안목이나 수준으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자신은 아무래도 없었다. 그렇다면, 조치원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나'라는 한 사람이 조치원에 도움이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문득, 가능성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에서는 내담자의 자원이나 강점을 발견하는 걸 중요시한다. 내담자가 특정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 경험에 갇혀 부정적인 면만 보기 쉬운데, 반대편에는 그의 삶을 여태껏 지탱해 주거나 상태를 더 나빠지지 않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6기 서포터즈 청년들이 조치원의 문제점을 발견하며 아이디어를 실현해나간다면, 나는 조치원이 조치원이라는 지명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에 중점을 두고 고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재생은 오래되거나 낙후된 도시를 처음부터 새롭게 만드는 재개발 사업이 아닌, 정말 필요한 부분을 하나씩 고쳐서 살기 좋게 만들어가는 방법이라고 한다. 조치원이 조치원으로 사람들에게 불리는 데에는 그만한 배경과 역사가 있고, 그 중심에는 주민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한 지역의 복지관에서 진행하는 가족 프로그램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집단에서는 그 지역의 특성이 많이 묻어났다. 가족들은 대부분 바쁘게 지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았으나 가족들끼리 뜻을 모아 의지하고 연대하며 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던 모습은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 편을 아리게 한다. 그 지역의 힘을 나는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표정에서, 말에서, 행동에서 내일을 기대하게 되었으니까. 희망은 때때로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희망을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목소리와 기운이 느껴졌다. 조치원의 도시재생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역시 주민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기에 나는 조치원 사람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아니 마음으로 담아오겠다는 결심했다.          


출발한다. 서울역에서 탄 기차가 용산, 노량진을 거쳐 영등포에 다다랐다. 승객들이 탄다. 좌석표를 확인하거나, 선반에 짐을 올리는 사람들로 복도가 분주하다.          


서울역을 출발한 지 몇 분이나 지났었을까. 하늘을 보았다. 흐릴 거라는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화창했다. 친구들과 경찰과 도둑을 하며 온 동네를 누비던 그 시절이 생각날 만큼. 고개를 젖히고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하늘이 푸르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던 것처럼.         

 

노곤한 일요일 오후, 뛰놀다 들어와 씻는 것도 잊은 채 아침에 정리하지 않은 이부자리에 그대로 들어가 단잠에 빠진 모습이 떠오르는 구름, 만질 수 있다면 분명 푹신한 감촉일 저 구름이 나를 집으로 데려간다.      

   

조치원역에 가는 길은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지난 조치원 방문 이후로 처음 타는, 달리는 기차의 소리마저 고요한 이 시간이 그리웠나 보다. 조치원으로 향하던 작년 12월 기차에서는 지역 내에 내 발자국이 안 찍히는 곳이 없기를 바랐다면 이번에는 느리게,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서서히 둘러보겠다고 다짐했다. 조치원역 앞은 이전 방문 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오전 11시 30분, 다소 북적이는 인파를 예상했던 나의 기대와는 달리 한산한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주말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던 거리는 조치원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를 앞서게 했다. 어디로, 어디를 향해 걸어야 조치원의 역사와도 같은 주민들을 고루 만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발길이 전통시장으로 자연스레 향했기 때문이다.           


시장은 나에게 물건이나 식료품을 파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홍은동에 위치한 포방터시장은 부모님과의 추억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느티나무 집에서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왼손은 엄마에게, 오른손은 아빠에게 맡긴 채 두 다리를 가슴께까지 올리며 깔깔대던 장면은 그 길을 걸을 때마다 다시 깨어난다. 지난 방문 때에도 조치원 전통시장 주변을 서성이며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코를 찡긋하게 만드는 옛 기억이 떠오르는 걸 보니 오늘도 다르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문득 들었다.          


시장은 주말 때보다 여유로웠다. 입구로 들어서며 활기 띤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조치원역 주변만큼이나 적은 유동인구에 걱정이 앞섰다.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싶었는데 시장에조차 사람이 적다면 어디를 돌아봐야 할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기우임을 이내 깨달았다. 걸을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이 클로즈업한 것처럼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어른들의 얼굴을 보며 조치원 안쪽에 자리 잡은 골목길이 연상되었다. 가수 박기영  씨가 부른 <아네스의 노래>라는 노래를 듣다 보면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이라는 가사가 나온다. 이는 영화 <시>에서 배우 윤정희 씨가 극 중에서 쓴 시의 구절이기도 하고, 이창동 감독이 직접 지은 시이기도 하다. 전통시장에서 본, 세월이 내려앉은 어른들의 얼굴에서 문득 '오래된 골목'이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이곳이 조치원 그 자체이고, 이미 조치원의 골목골목을 걸은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문득 벅차올랐다.        


시장을 빠져나와 조천교를 통해 세종시 치매안심센터 주변으로 향했다. 주민들의 삶을 두 눈에 두루 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몇 눈에 띄지 않았다. 하늘은 점차 흐려지더니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는 한산했고 대문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던 아이마저 집으로 돌아갔다. 걸음을 재촉했다. '이러다가는 소기의 성과 없이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빗방울은 점차 굵어졌고, 빨라져 가는 나의 걸음만큼 마음 또한 다급해져 갔다.       

   

조치원역에 다다를 즈음 비가 그쳤다.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육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걸었던 길에는 기억이 묻어있다. 다시 걸으면 걸었던 옛 기억이 때로는 지진한 아픔으로, 때로는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침산리로 나아가는 나에게 추억이 한 움큼 쏟아졌다. 방아미 마을과 벽화, 침산공원에 올라 마시던 물 한 모금이 생각났다. 또한,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았던 전경과 내쉬던 숨은 마음으로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발바닥에 맺히는 땀의 양만큼 그 지역을 알아가게 되기에, 고향을 방문한 듯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볕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교하는 대동초등학교 학생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완연한 봄이자 다가오는 여름을 알리는 바람이 다가왔다. 발길은 당연한 듯 침산공원을 향했다. 조치원제일감리교회를 지나 도착한 이곳에서는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 들었다. 명소는 저마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경치가 좋은 곳만이 명소로써 사람들에게 기억되지는 않는다. 그 장소와 만날 당시에 가지고 있던 사연과 풍경, 마음이 만나 조화를 이루면, 그곳을 회상하는 훗날의 우리에게 명소로 불리게 된다. 침산공원은 나에게 명소로써 기억되었다. 지난 방문 때는 학업과 논문,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스트레스가 많았다. 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조치원을 둘러보고 우연히 발견한 침산공원의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던 그 순간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다시 떠올리는 지금 또한 눈가가 촉촉해진다.        


한참을 쉬고, 다시 조치원 전통시장으로 돌아갔다. 한낮보다 많은 유동인구가 있었고, 시장은 활기를 띠었다. 길 한 편에 서서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조치원 거리에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 그들의 생동감 있는, 마스크 너머의 표정을 두루 볼 수는 없었지만 조치원을 걸으며 드러나는 나의 생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날씨와도 유사했다. 맑았다가 흐렸다가 하는 오락가락한 날씨가 하루 내 이어졌지만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 5시, 하늘은 봄의 푸르름을 고스란히 되찾았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 다시 찾은 전통시장에는 봄을 닮은 사람들이 있었다. 주민들의 눈가에, 손길에, 걸음걸이에, 목소리에 저물었던 벚꽃이 다시 피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사람들의 눈가에 어린 가능성을 마주하고 싶은 마음으로 거닐었던 이번 조치원 여정은 계획처럼 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을 두 눈에 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확은 있었다. 나에게 생기가 없다면 사람들의 생기 또한 느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친 마음에는 지친 사람들만, 다급한 마음에는 다급한 사람들만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닐까. 생기를 되찾아 간다. 나의 마음으로 뒤늦은 봄의 향기가 다가온다. 전통시장을 거니는 조치원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내음을 힘껏 마셔본다. 다음을 기약하지만 아쉬움은 없다. 6기 서포터즈 청년들과의 만남 이후에 다시 한 번 조치원에 들를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그날에는 어떤 하루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하고, 설레고, 희망하게 된다. 볕처럼 섬세한 미소로 조치원과 다시, 함께 만날 시간을 상상하면.        

              

참고문헌     

1. 박기영, 아네스의 노래, 20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