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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에겐 마음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

작가(도란)_조치원 도시재생 청년 서포터즈6기

청춘에겐 마음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


도시재생,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품을 만들다.   

작가(도란)_조치작가(도란)_조치원도시재생 청년 

서포터즈6기원도시재생 청년 서포터즈6기  



태어나 줄곧 한 도시에서 30여 년을 살았다. 특별한 계기가 생기지 않는 이상 결혼 전까진 본가에서 줄곧 살아가는 게 당연한 시절이었다. 그 도시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졸업했다. 하지만 취직은 서울에서 하게 됐고, 왕복 3시간을 오가기 시작했다. 한 번쯤 독립을 꿈꿔볼 만도 하련만, 나는 이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고향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지난한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직장생활은 부침이 컸다.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자신감 넘치던 나는 회사에 가보니 생각보다 부실한 인간이었다. 하루에 잘 수 있는 시간은 4시간 남짓. 야근을 열정이라 고쳐 읽어야 했고, 주말에는 밀린 공부와 취재 준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숨 막히고 지치는 나날 중에도 20대는 이런 것을 견디고 견뎌야만 원하는 바를 누리고 선택할 수 있는 30대가 기다린다며 근거 없이 나를 위로하곤 했다.      


그러던 중에도 도무지 숨이 트이지 않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은 주로 일요일이었다. 늦잠을 자고 혼곤하게 일어나 창밖을 보는데, 그 창밖이 뿌연 안개로 가득한 날. 내일이면 다시 지옥철에 몸을 욱여넣고 앉자마자 피곤해지는 회사 책상으로 향한다는 사실이 끔찍한 날.      


그럴 때면 대충 세수만 한 뒤 카메라를 가방에 담고 가까운 곳으로 나갔다. 일단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익숙한 곳에 내려 정처 없이 걸었다. 그때 자주 발길이 닿던 곳 중에는 헌책방 거리가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의 구도심에는 헌책방 거리가 있었다. 수십 년 전, 학기 초면 학생들이 몰려와 저렴한 가격으로 참고서와 문제집을 사던 곳이다. 학기 초엔 학생들이 몰렸지만, 평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저렴한 가격에 책을 사고 종이 냄새를 맡으러 몰리던 곳이다. 헌책방 거리는 나보다 앞선 세대에게 인기 있던 장소였고,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한결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쯤 지나 내가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던 20대 중반 무렵의 헌책방 거리는 ‘낡음’을 따뜻하게 활용한 거리로 바뀌고 있었다. 인근 전철역에 내려 헌책방 거리로 향하는 길목은 언제 그리 칠해뒀는지 따뜻한 벽화로 그득히 채워져 있었다. 거리의 중간쯤에 있는 오래된 양조장 건물에는 누가 만들었을지 궁금해지는 듬직한 체구의 양철 로봇이 한자리를 차지했다. 그곳에서는 대안 예술 활동과 교육 프로그램이 열렸다.      

군데군데 작은 전시회도 열렸다. 책을 사고파는 이들이 모이던 거리에는 이제 쉬어가려 찾아온 이들을 잡아끄는 카페가 생겼고, 오랫동안 유지한 외관을 예쁘게 단장해 새 출발하는 가게도 있었다. 또 여전히 영업 중인 헌책방과 독립서점은 헌책방 거리의 맥을 잇고 있었다.                


과거의 번영을 기억한 이들이 노력한 덕분일까. 기억 속으로 사라질 법한 헌책방 거리는 예스러운 감성에 미적 감각이 더해져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새로이 얻었다.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세를 얻은 건 덤이었다.    

 

낯선 직장생활, 내가 선택한 직업이지만 그 ‘선택’에 자신이 없었던 시절. 카메라와 함께 찾았던 헌책방 거리는 예민하게 들끓는 마음을 다독였다. 시끌벅적함과 거리가 먼 골목골목을 누비며 만나는 길고양이, 분명 어떤 마음을 담아 그렸을 벽화, 멀리서 전철이 들어오며 전해지는 두근거림. 그런 요소들이 수런거리며 지친 마음을 꾹꾹 눌렀다. 그럴 땐 온 거리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힘들 땐 한 번씩 돌아와서 쉬고 가면 돼. 마음이 풀리면 다시 네 자리로 가면 되잖아.”

아예 그 거리에 터를 잡고 살 것도 아니고, 매일 출근 도장 찍을 것도 아니라면 헌책방 거리는 마음이 부대낄 때 와서 내킬 때까지 걷다 가는 장소로 제격이었다. 그리고 마음이 개운해지고 그날 찍은 사진 중에 눈을 반짝이게 하는 컷이 몇 개쯤 나오면 약소한 기쁨도 얻었다.      


그런 장소가 있었기에 나는 20대에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을 겨우 넘었던 게 아닐까. 고단한 그 산을 넘어야만 다음 산행을 계획할 수 있고 잠시 숨도 고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헌책방 거리로 돌아가 산을 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슬쩍슬쩍 빌려온 게 아닐는지.      


이제 와 생각해보면 ‘삶은 여행’이라는 고리타분한 말이 내게도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게 된다. 돌아갈 곳이 있으니 여행도 가능한 것이다. 나는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여행을 떠나 여행을 마치는 삶이길 바란다.      


그 여행에서는 한 번씩 무릎이 꺾이고 힘이 고갈돼 아무 데나 드러눕고 싶은 날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럴 때 돌아갈 곳이 없다면 얼마나 막막할까. 물론 가족이 있는 집이 원천적으로 돌아갈 곳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나 홀로 마음 누일 곳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헌책방 거리가 내게 그런 장소였다. 그래서 그 시절 낡을 대로 낡은 거리를 단장하고 따뜻한 공간으로 만드는 데 힘을 모아준 누군가에게 고마운 마음도 든다. 그들은 삶의 터전이자 생계의 목적으로 그곳을 단장했을지 모르지만, 돌아갈 곳이 절실했던 나의 청춘에겐 없어서는 안 될 충전소였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도시재생’이란 단어를 내식대로 풀자면 ‘돌아가도 좋은 곳’이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신식으로 뜯어고쳐 도회적인 신식 건물이 빽빽이 들어서는 것보다 힘을 잃어가던 기존의 도시를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도시재생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또 과거 20대의 나처럼 갈팡질팡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는, 그야말로 비빌 언덕이 돼주는 것 역시 도시재생이다.      


조치원역 도시재생 청년 서포터즈와의 활동을 제안받으면서 처음 든 생각도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이 활동에 참여하는 청년에게 도시재생은 무엇일까. 그들이 기억하는 조치원역은 어떤 모습이며 현재는 어떠한가. 우리는 돌아가고 싶은 조치원역을 만나기 위해 무엇을 재생해야 할까. 그로 인해 지금의 어린 청소년과 청년들이 세상의 부침을 겪을 때 돌아가고 싶은 장소 중 한 곳이 조치원역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고갈되는 날이면 고향의 헌책방 거리의 품에 안겨 마음을 다독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향할 땐 사막처럼 말라버린 마음에 조리개로 시원하게 물을 뿌린 듯 풍성해진 내 민낯을 되찾곤 했다.    

 

조치원역도 돌아오는 이들에게 언제든 양팔 벌려 안아주기에 충분한 곳으로 재생되길 기다려본다.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조치원역은 역 근처에 할머니 살 내음처럼 포근한 전통시장이 있고, 봄이면 벚꽃이 후둑후둑 떨어지는 조천변이 있다. 내 고향의 거리처럼 벽화로 채워진 문화마을이 있고, 조치원에서 새로운 청춘을 꽃피우기 시작한 청년과 상인이 북적이는 상가가 곳곳에서 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조치원은 이제 준비가 된 것 같다. 언제든 돌아가도 괜찮은 ‘품’이 되어줄 준비 말이다.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장소가 자신만의 특별한 충전소가 되고, 그 경험을 통해 조금 튼튼해진 나로 살아가는 것. 청년에게 도시재생이란 그런 ‘품’을 만들어줘야 할 의무도 분명 있다고 믿는다. 그야말로 청춘 조치원이 되길. 돌아갈 곳이 있어 지금까지 잘 버티고 살아온 내가 보태는 간절한 참견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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