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권성민) - 조치원 도시재생 청년 서포터즈 5기
-권성민 작가 (예능 PD)-
맛있는 거 먹자고 꼬셔 / 영화 보러 가자고 불러 / 단대 호수 걷자고 꼬셔
넌 한 번도 그래 안 된다는 말이 없었지
꽃송이가 꽃송이가 그래 그래 피었네
꽃송이가 꽃송이가 그 꽃 한 송이가 그래 그래 피었구나
‘버스커버스커’로 알려져, 이제는 본인의 이름으로 더 알려진 장범준 씨의 노래 「꽃송이가」의 가사 일부다. 무난해서 폭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어휘들 속에 유독 눈에 띄는 단어가 보인다. ‘단대 호수’다. 단대, 하면 단국대학교의 준말이라는 건 아마도 상식이다. 그런데 실제로 단국대학교에 가본 사람이 이 가사를 읽으면 좀 어리둥절할 거다. 죽전에 있는 단국대학교 캠퍼스에는 호수가 없으니까. 아, 그 단대가 그 단대가 아닌가?
노래에 등장하는 ‘단대 호수’는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앞에 있는 호수다. ‘안서호’라고 불리기도 하고 ‘천호지’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그냥 ‘단대 호수’라고 부르는 사람이 제일 많은 이 호수는, 천안 사람들이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고 호변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제법 큰 호수다. 광주 출신의 장범준 씨는 상명대학교 천안캠퍼스에서 대학생활을 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같은 천안에 있을 뿐 다른 학교인데 어떻게 거기가 거기라고 확신하느냐 묻는다면 천안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천안에 있는 단국대학교와 상명대학교 캠퍼스는 창문을 열면 서로의 건물이 보일만큼 지척에 있다. 게다가 같은 동 단위 안에 호서대학교와 백석대학교 캠퍼스까지 모여 있다.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할 즈음 만나는 천안의 초입에 대학 캠퍼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는 사실은 천안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이다. 이 동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호감이 있는 이에게 괜히 단대 호수나 한 번 걷자고 찔러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적당히 고요하고 적당히 낭만적인 단대 호수 산책로는 제법 괜찮은 공략 코스다. 그러니 천안 사람들에게 이 노래 가사는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그 ‘단대 호수’ 이야기다. 듣는 순간 저마다의 기억을 떠올리며 ‘장범준도 그랬구나’하고 피식 웃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잘 알고 있는 것도, 나 역시 천안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역의 고유명사가 갖는 힘이 있다. 작사가 김이나 씨는 처음 작사를 할 때 ‘너무 구체적이거나 개인적인 소재는 담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특정 타깃만 향한 콘텐츠라면 모를까, 불특정 다수가 소비하는 대중예술의 경우 그만큼 보편적이고 폭이 넓은 경험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고. 그러나 몇 차례,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생각했던 경험들을 조심스럽게 가사에 녹여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자신만의 구체성을 투사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사람살이, 생각보다 그렇게 다르지 않다. 애초에 예술이라는 영역 자체가 작가가 만들어낸 결과물에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투사하는 과정이다. 윤종신 씨의 노래 「1월부터 6월까지」의 가사, ‘이촌동 그 길 아직도 지날 땐 /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해요 / 밤의 공원도 그 햄버거 집도 / 지하상가 그 덮밥집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촌동 근처조차 안 가본 사람이라도 이 노래를 들으면 저마다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지하상가 덮밥집은 터미널 김밥집이 될 수도 있고 기차역 앞 우동집이 될 수도 있다.
서울에 오래 산 사람도 노상 운전을 하지 않는 이상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이름을 줄줄 외우고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양화대교’는 이제 다 안다. 그저 합정과 당산을 이어주는 무심한 다리였던 양화대교는 자이언티의 노래 덕분에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는 매개물이 되었고, 서울에 살지 않는 사람도 각자의 자리에서 눈에 띄는 다리를 바라보며 일상의 소중함을 되새긴다.
물론 천안 사람들이 ‘단대 호수’에 더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 있듯, 이촌동 지하상가의 맛있는 덮밥집을 아는 사람이라면, 출퇴근길마다 양화대교를 건너는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좀 더 내밀한 특별함이 있을 것이다. 영화, 드라마, 문학, 노랫말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동네의 구체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 예술을 좀 더 생생하게 즐길 수 있다는 뜻이며, 동시에 내가 디디고 살아가는 지역을 받아들이는 층위가 한층 더 풍성해진다는 뜻이기도 할 거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아쉬움이 고개를 든다. ‘신촌을 못 가’고, ‘신도림역 앞에서 스트립쇼를’ 추고, ‘비 오는 압구정 골목’에서 술에 취한 이야기처럼 서울을 노래하는 노랫말은 참 많다. 하지만 ‘단대 호수 걷자고 꼬시는’ 노랫말에서도 설레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서울을 벗어나면 이런 이야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예술과 콘텐츠를 직업 삼아 벌어먹고 살려면 아무래도 서울에 제일 기회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아니 그건 어떤 직업이든 비슷할 것이고, 결국 너도 나도 서울을 노래하고 서울에서 노래하고 서울을 이야기하고 있다.
천안은 제법 큰 도시다. 천안이란 도시 자체로도 그렇지만 서울까지 지하철 노선이 닿는 데다 고속버스로도 한 시간이면 갈 수 있어 광역 서울생활권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런 천안임에도 이곳에서 10대를 보내고, 서울로 대학을 진학해 서울과 천안을 오가는 동안 나는 문화예술과 콘텐츠를 아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서러운 일이 많았다.
모든 문화예술은 서울에 있다. 전시도, 공연도, 다양성 영화도 천안에서 보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서울에 가야만 볼 수 있었다. 모처럼 큰마음 먹고 티켓을 끊은 뮤지컬은 보통 8시에 시작하는데, 2시간 반을 하는 뮤지컬을 보고나면 천안으로 가는 11시 막차를 타기 위해 허겁지겁 터미널로 뛰어가곤 했다. 공연 분위기가 아주 좋은 날엔 커튼콜만 십여 분을 하는데 이 축제를 즐기는 것은 남의 일이었다. 서울에서 고작 차로 한 시간 떨어져 있는 천안에서도 문화예술을 즐기는 일은 이토록 어렵다. 요즘에야 온라인 실황중계도 많이 있어서 콘텐츠 자체에 대한 물리적 접근성은 많이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직접 그 공기를 마시면서 경험하는 질감까지 전해주지는 못한다.
다만 이렇게 문화예술적 토양이 척박한 지역이라 얻었던 이점도 있다. 내가 콘텐츠를 향유하는 것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드는 것도 좋아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학생들과 함께 콘서트나 뮤지컬 무대를 만들기도 하고, 국제구호 프로젝트를 위한 모금행사나 거리공연을 기획하기도 했다. 볼 것이 넘쳐나는 서울에서는 아마추어들이 하는 이런 작업은 그 수준이 아무리 뛰어나도 관심을 얻기가 어렵다. 날고 기는 프로들조차 자신들의 결과물에 눈길 한 번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서울인데, 설익은 학생들의 무대야 가족과 친구들이라도 잔뜩 와주면 그것만으로도 큰 성공인 셈이다.
하지만 천안에선 달랐다. 워낙 무대나 공연 자체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이 꾸민 것이라 한들 수준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으면 관심이 모였다. 성긴 만듦새의 고등학교 축제에도 사람들이 몰릴 만큼 구경거리가 없는 도시였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천안 흥타령 축제’ 이전까지 천안 사람들의 가장 큰 축제는 대기업 재단이 운영하는 사립고등학교의 벚꽃축제였다. 앞서 언급했던 ‘단대 호수’로부터 걸어서 십 분이면 가는 이 고등학교의 벚꽃축제는 학교 축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온 천안 사람들이 다 몰려들곤 했는데, 그래서 천안 사람들은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도 이 축제를 노래한 것일 거란 강한 심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 역시 천안의 빼놓을 수 없는 데이트 코스였으니까.
어쨌거나 이런 도시에서 자란 덕분에 나는 고작 10대, 20대에 수천 명 관객 앞에서 내가 쓴 대본과 악보로 이루어진 무대를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탄자니아에 식수펌프를 공급하겠다는 막연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프로젝트로 수천만 원을 모금하는 경험도 해보았다. 여기에 울고 웃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도 느껴봤다. 이 작은 도시에서는 무대 위에 오른 이가 꼭 내 지인이 아니어도 한 다리 두 다리 건너면 다 알 수 있는 사이였고, 그 사실 또한 꾸준히 이러한 작업을 하는데 소소한 화젯거리를 낳으며 힘을 보탰다.
매년 이어진 이런 작업들은 천안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얻기 시작했고, 지역의 문화예술기관 및 단체와 협력하며 이런저런 부가 활동들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들이 내가 PD라는 직업을 얻는데 가장 중요한 양분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여기에 함께 참여하고 비슷한 벅참을 느꼈던 다른 친구들 또한 문화예술계 곳곳에서 저마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더불어 이들도 그 양분을 어디서부터 얻었는지 기억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향의 또 다른 이들이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우려 애쓴다.
유명한 노랫말에 작게 지나가는 한 지명에도 그 지역 사람들의 마음은 괜스레 설렌다. 좋아하는 영화에 마침 내가 자주 가는 동네의 모습이 스치면 어쩐지 그 영화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하물며 내가 딛고 사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이 곳에서 쌓인 이야기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면 그만큼 살아서 다가오는 예술도 없을 것이다.
방송사 PD가 된 이후로 회사의 콘텐츠만을 한창 만들다 보면, 이 정해진 포맷 안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무료해지는 순간을 한 번씩 겪는다. 모두에게 말을 걸지만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럴 땐 가끔 사비를 털어 개인적으로 만들고 싶은 이야기를 영상에 담아본다.
그중에 한 가지가 <신촌 기억전>이란 이름의 단편영화 연작이었다. 나는 서울로 대학을 진학해 직장생활을 하는 지금껏 신촌 인근에서만 십여 년을 살아왔으니 이십대, 삼십대가 모두 신촌이란 이름 위에 쌓여온 셈이다. 그래서 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었다. 내가 자주 갔던, 인상적이었던, 사랑했던 공간들을 영상으로 기록해두고 싶었다. 그냥 기록 영상 형식의 다큐멘터리로 담는 것은 조금 재미가 없을 것 같아, 공간이 주인공이 되는 드라마 타이즈를 써보았다. 이 공간에서 벌어졌을 법한 일들, 그곳에서 나누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을 극으로 재구성해 해당 공간의 협조를 얻어 짧은 영화를 찍었다.
돈 없는 대학생들이 아지트처럼 드나들던 지하의 주점, 도서관 대신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공부하던 어느 유서 깊은 다방 같은 곳들. 특별히 대단한 서사도 없고, 부족한 사비를 탈탈 털어 만든 이 저예산 영화는 그저 내 만족을 위한 작업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예상 밖의 반응을 만났다. 특별히 어디 알리지도 않고 그저 내 개인 SNS에 올려두었을 뿐인 영상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공간에서의 저마다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그 기억을 함께 나누고픈 사람들을 영상으로 불러들였다. 고유명사에는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술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기억, 자신의 감정, 자신의 경험을 소환할 매개체가 필요한 것이다. 지역의 이야기가 가지는 힘이 여기에 있다.
천안과 이마를 맞댄 도시, 조치원에서 도시재생사업을 위해 뛰어든 청년들을 만났다. 다양한 관점과 경험치 사이를 공통으로 가로지르는 한 가지는 어떻게 하면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조치원 사람들에게 이 도시에 원하는 것을 질문한 자료도 보았다. 내 눈에 띈 한 가지는, 즐길만한 문화예술 콘텐츠가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여전히 이야기는 서울에 많다. 서울을 이야기하고 서울에서 이야기하고 서울에서 듣는다. 하지만 작은 도시들에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할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이 서로 만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발굴할 수 있는 마당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서울의 화려한 전문가들이 만든 이야기가 닿지 않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함께 발을 딛고 선 땅의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형태를 만든다면 그 감동 또한 못지않을 것이다.
그저 차가운 철교일 뿐이었던 양화대교에 온기를 불어넣은 것도 이야기의 힘이었다. ‘단대 호수’를 노래한 ‘버스커버스커’가 가장 강력하게 생기를 불어넣은 도시가 있다면 단연 여수다. 실제로 문체부의 통계를 확인하면 2012년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가 나오자 여수시를 찾는 관광객은 700만 명에서 1500만 명으로 급증했다. 그것도 노래가 나온 3월 29일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여수라는 도시가 특별히 물리적으로 변한 것은 없었다. 똑같은 도시에 노래 한 곡이 새로운 이야기를 더했을 뿐이다. 물론 거기서 끝난다면 잠시 반짝할 뿐이었을 것이다. 여수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수 밤바다」의 아름다움을 실체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관광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구축했다. 덕분에 사람들은 여수 밤바다에 ‘버스커버스커’의 노래를 넘어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다시 덧붙이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진다.
때로는 큰돈을 들여 물리적인 조건을 바꾸는 것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활기가 더해질 때가 있다. 상권 개발 같은 물리적인 변화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행정적인 계산과 숫자로 이루어진 개발보다 각자의 생명력이 담긴 이야기로부터 이어지는 물리적인 변화가 좀 더 튼튼하고 정확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