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쌀한 믹스커피, 우아한 예가체프

문화의 향유인가 허영인가

by SUR

고등학교 때까지 커피는 내게 '불량음식'이었다. 커피를 먹어본 것이 손에 꼽고, 게다가 커피라고 해봐야 믹스커피나 캔커피 레쓰비 정도였다. 당시에 건강하지 않은 음식을 강박적으로 싫어하시는 것 같던 엄마 덕분에(어느 순간부터 '나 이런 거 안 좋아하는데' 하시면서 우리가 권하는 햄버거, 치킨, 피자를 절대 거절하지 않고 즐기시는 것을 보면,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에 외식값을 줄이기 위한 엄마의 고도의 전략이 아니었나 싶다.) 나 또한 햄이나 치킨, 햄버거, 커피 같은 음식을 먹으면 몸을 망친다고 생각했다. 새벽까지 공부하던 고3 시절에도 프리마가 내 장기에 들러붙어 몸을 망칠까, 커피가 뇌세포를 파괴해 머리가 나빠질까 걱정돼 커피는 잘 마시지 않았다. 달콤 쌉쌀한 믹스커피의 맛이 매우 유혹이 될 때도 있었지만, 건강에 대한 염려가 더 강력했기에 믹스커피를 먹어도 그저 몇 번 홀짝거릴 뿐이었다.

대학교에 와서 겪었던 문화충격 중 하나는 학교 내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용하는 카페가 있었다는 것. 이런 카페는 하루 종일 미국 뉴스가 나오는 대형 스크린이 있고, 교환학생이나 외국 교수님이 자주 보이던 글로벌 라운지나, 새로 지은 상경대학교 같이 고급스러운 건물 안에 있었다. 내가 대학교 신입생이던 당시는 미국 커피전문점 스타벅스가 프리미엄 커피 콘셉트로 서울 대학가, 강남일대를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학교 앞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 잔 가격은 한 끼 밥 값으로, 평범한 대학생이 매일 즐기기에는 꽤 비쌌다. 학교 카페에서는 아메리카노 한 잔이 1,500원, 생크림을 잔뜩 올린 아이스 카페 모카는 3,500원이었다. 자판기 고급 커피가 300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비싼 가격이긴 했지만, 스타벅스 반값에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고급 커피를 즐길 수 있다니 가성비는 높았다. 학교 카페의 아메리카노에서는 신선한 원두향이 났고, 칼로리가 엄청 높을 것처럼 보이는 아이스 카페 모카는 고급스러운 달콤함을 선사했다. 커피는 나쁜 음식이라 여겼던 나도 어느 순간 아침에 일찍 나와 여유롭게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거나, 연강을 마치고 당충전을 위해 아이스 카페 모카 한 잔 먹는 것이 일상이 됐다. 커피는 더 이상 피해야 할 음식이 아니라 '향유해야 하는 멋진 문화'가 됐다.

고급 커피 문화를 찾다 보니 드립 커피를 알게 되고, 직접 원두를 구매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갓 로스팅한 원두에서 흘러나오는 아로마는 매우 황홀했고, 드립 커피를 즐길 때 집 안을 감싸는 커피 향이 우리 집과 나의 품격을 높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커피 고수들이 즐긴다는 에스프레소의 세계도 접하게 됐다. 에스프레소로 독특하고 진한 커피맛을 느낄 수 있고, 거기에 설탕을 넣어 먹으면 그것이 또 별미라고 했다. 나보다 더 대학생 고급문화에 빠져있던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 여러 커피 고수들이 추천한 서울 중구의 어느 에스프레소 전문 카페를 방문했다. 스타벅스의 세련된 느낌보다는 고급스러운 다방을 연상시키는 카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싱글 원두 드립, 에스프레소가 주 메뉴였는데, 주인의 추천으로 예가체프 에스프레소를 시도했다. 작은 잔에 담긴 새까만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 샷, 설탕이 담긴 볼과 작은 티스푼이 함께 서빙됐다. 주인은 에스프레소를 음미하다가 샷이 조금 남았을 때 설탕을 넣어 먹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아! 인터넷에서 커피 고수들이 이야기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예가체프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순간, 강렬하면서도 신선한 산미가 느껴졌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처음 경험하는 커피 맛이었던 것은 확실한데, 맛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사실 맛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예가체프 에스프레소 샷이 내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평범한 대학생이 아닌 뮤지컬이나 전시회를 관람이 취미인 커피 애호가, 외국 유학을 가서 방학을 이용해 잠시 한국에 들른 유학생이 된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나는 집에서 에스프레소를 맛보기 위해 당장 모카포트를 주문하고, 갖가지 싱글 오리진 원두를 구매했다. 드립 커피 한 잔, 에스프레소 한 잔은 대학생이 되면서 인지한 별 볼일 없이 평범한 현실 속 나에게서 잠시 눈을 돌릴 수 있도록 해줬고, 내 허영심을 채워줬다. 그렇게 드립이며 에스프레소며 하루에도 몇 잔씩 커피를 들이켜다가 결국 심장이 쿵쾅거리고 위가 쓰리고 밤에 잠이 오지 않는 카페인 부작용에 시달리고 나서야 커피가 주는 환상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제는 다양한 시그니처 메뉴를 내세우는 개인 카페가 거리에 넘쳐나고, 에스프레소바도 쉽게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커피 문화는 대중화됐다. 이제 난 컴퓨터 작업을 해야 하면 사람이 많은 스타벅스보다는 조용하고 자리가 편한 카페를 찾게 되고, 매번 커피를 사 먹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있는 스틱 커피를 즐길 때도 많다. 물론 LP음악을 틀어주는 분위기가 좋은 카페, 커피나 디저트가 맛있다고 소문난 카페를 찾아가 보기도 하지만, 이 경험 자체로 내가 특별해진 듯한 두근거림을 주지는 않는다. 커피는 이제 내가 언제든지 취하고 놓을 수 있는 대상이 됐다. 대학생 때 나는 커피 문화를 향유했던 걸까? 아니면 지출 가능한 수준에서 누릴 수 있는 동경의 대상 커피를 통해 헛헛한 내 허영심을 채워던 걸까? 명품 브랜드의 옷이나 가방, 유명한 셰프가 운영한다는 고급 레스토랑, 백화점 VIP라운지, 트렌디한 사람들이 간다는 성수동 팝업 스토어... 커피를 대체할 수 있는 '동경의 대상'은 언제나 넘쳐난다. 현재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커피에서 자유로워진 지금에야 비로소 내가 커피 문화를 진정으로 '향유'하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 그리고 내가 동경하는 무언가를 소유한다고 해서 내가 그만큼 채워지는 건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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