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는 겪고 또 겪어도 모르겠다.
"실은 저, 엄청 내성적이에요."
성격에 대해서 주변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실은 내가 내성적이다,라고 밝히면 많은 선생님들이 놀란 표정을 짓곤 했다. 하나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며. 평소에 먼저 말도 건네고 묻지 않아도 이 이야기 저 이야기 꺼내는 나를 두고 누구도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꼭 그 사람의 성격이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디에선가 들었는데, 외향적인 성격과 내향적인 성격은 어디서 에너지를 다시 충전하느냐에 달렸다고 한다. 타인과 만나고 어울리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외향적인 성격과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며 편안함을 찾는 내향적인 성격.
나는 극단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또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할 이야기가 없어서 침묵하게 되는 어색한 상황을 극도로 싫어한다. 누구나 한 번쯤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할 말이 뚝 끊기며 침묵이 감도는 어색한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을까. 나는 그런 상황이 정말인지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리고, 두 극단적 성향이 만나면 꼭 사고를 친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침묵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 나는 내 머릿속을 먼지 나게 탈탈 털어서 무엇이든 할 말을 쥐어짜곤 했다. 가끔은 좋은 소잿거리나 이야깃거리를 찾아내는 데 성공해서 화기애애하게 말을 이어갈 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덜컥 뱉고 후회에 이불을 뻥뻥 찬 적도 많았다. 가끔은 이렇게 쥐어짠 말이 부메랑으로 날아와 나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지인이나 직장 동료뿐만 아니라 내가 정말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도 나타났다. 오히려,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 그런 압박은 더 심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의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내가 이 사람과 친하니까, 내게 있었던 모든 일을 공유해야 할 것 같은 압박. 이 압박은 어색함을 싫어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거였다. 내가 우정을 증명하기 위해 고백한 나의 마음속 이야기는 어느 순간 나의 발목을 잡는 약점이 되었으니까.
내가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고 느꼈던 이면에는 상대방과 충분한 감정적 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한 데서 오는 위화감이 컸던 것 같다. 조금 늦었지만,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며 만나는 모든 이들과 친근함을 느낄 수 없기에 어색함을 견뎌내는 것은 어른으로서 늘 감당해야 할 사회생활의 무게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진짜 가까운 사람은 함께 있을 때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한 사람이라는 것도. 친하다고 모든 것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가끔은 적당히 거리를 지킨 사생활이 서로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는 법이다.
인간관계는 겪고 또 겪어도 모르겠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가도 또 끊임없이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작년에 갓 서른이 되어 잠시 한국에 들어갔을 때, 나를 잘 챙겨주셨던 예순의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내가 '이제 서른쯤 되니 조금은 세상 사는 걸 알 것 같다.'라고 하는 내게 선생님은 '나는 예순이지만 아직도 하나도 모르겠다.'라고 하셨다.
그 말이 나를 얼마나 무섭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이미 많이 겪었는데 앞으로도 더 많은 일이 있을 거란 말로 들려서. 어쨌거나 삼십 년을 살며 '어색한 상황에서 말을 쥐어짜지 않는다.'라는 교훈을 하나 얻었으니, 나머지 삼십 년을 이 교훈 하나를 무기 삼아 살아봐야겠다,라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