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R Jan 04. 2021

독이 되는 말 '예쁘다'

외모에 대한 강박은 어쩌면 그 말 한마디에서 왔을지 모른다.

"너,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다."


나는 정말인지, '예쁘다'는 소리가 좋았다. 빈말이든 진심이든 그냥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예뻐졌네~'하면 절로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그래서 나는 '예쁘다'소리를 남에게 해주는 것도 좋았다. 내가 하는 말에 남이 기분 좋아하는 게 좋았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오랜만에 만나면 상대방의 예쁜 점이 자꾸만 보여서 그랬다. 


불과 1년 반 전까지, 나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너 살 빠졌다.', '피부 왜 이렇게 좋아졌어?', '못 본 사이에 예뻐졌네'를 포문으로 대화를 시작하곤 했다. 우리끼리의 인사라고나 할까. 그러면 친구도 비슷한 식으로 내게 칭찬을 해주고 우리는 잔뜩 들떠서 와글와글 떠들어대곤 했다. 개인의 '예쁘다'야 상대적인 개념이니 전보다 외적으로 '나아진 것'을 찾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예쁘다'를 표현할 수 있었고, 어릴 적부터 그렇게 살아왔기에, 나는 외모를 추켜세우는 게 최고의 칭찬인 줄 알았다. 


처음 화장을 시작한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지금으로부터 일 년쯤 전까지, 나는 화장을 하지 않으면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화장 애호가'였다. 내가 하는 화장이란 게 거창한 것도 없이 파운데이션을 찍어 바르고 립스틱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는 정도였지만, 어쨌든 나는 그 작업이 끝나지 않으면 학교에 지각을 하거나, 약속을 미루는 한이 있어도 절대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당시는 라섹수술 전이었으니 렌즈 끼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이제는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화장품들이 어디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쨌든 나의 과거는 화장을 한 꺼풀 쓰지 않고서는 집 앞 슈퍼에도 가지 않는, '화장은 예의야'라고 생각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더 나아가 얼굴에 뾰루지라도 하나 올라오면 괜히 자신감이 없어지고, 평생 저체중과 정상체중 사이를 오가며 살아왔지만 '다이어트해야 해'를 입에 달고 살았다. 내 주변인들도 자연스레 그런데 민감해서, 피부에 트러블이 있으면 '피부 왜 그래?', 살이 평소에 비해 조금만 찐 것 같으면 '통통해졌네', 머릿결이 조금만 푸석해 보이면 '이거 사용해봐'라며 자신이 사용하기 시작한 새로운 헤어 에센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그래서 나는 외모에 대한 관심을 놓을 수 없었고, 조금이라도 '예쁘다'의 기준에 부족한 점이 생기면 스스로 안달복달하지 못해 했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후 만난 친구들은 특별한 일정이 있는 게 아니고서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가끔 건조한 날이면 발라주는 립밤이 그들이 지닌 소지품의 전부였고, 아무도 그들의 쌩얼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도 외모나 화장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에, 이들이 쌩얼이건 아니건 나 역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습관처럼 화장을 하고 학교에 등교했다. 그냥 늘 그래 왔기에 여전히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학교 생활이 조금씩 익숙해지던 어느 날, 현지 중고등학교 수업 참관으로 인해 일찍 등교해야 일정을 깜박하고 늦잠을 잔 나는 처음으로 흔히 말하는 '쌩얼'로 학교엘 갔다. 맨 얼굴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신경 쓰이던 나와 달리 아무도 거기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아침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더니, '평소에 화장을 하고 다니는 거였어?'라는 반응으로 나를 다소 맥 빠지게 했다. 내가 화장을 내려놓기 시작한 게 그쯤이었던 것 같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사귄 라트비아인 친구 중에, 정말인지 '예쁘다'소리가 절로 나올만한 친구가 있었다. 처음 그 친구를 알게 된 후로 서너 번 정도는 만날 때마다 매번 'beautiful'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자제하려고 했지만 친구를 볼 때마다 그저 예쁘다는 생각뿐이라, 나는 늘 절제하지 못하고 그 말을 친구에게 인사처럼 뱉곤 했다. 예쁘단 소리를 들은 친구는 매번 이어지는 나의 칭찬을 좋아하기보다는 늘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 나는 내가 기대한 반응이 아니기에 늘 의문스러웠다. 왜 예쁘다고 했는데 기뻐하지 않는 걸까.


이제와 그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친구들에게 외모는 사람을 인식하는 하나의 인지 도구 역할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화장을 하고 말고의 사소한 차이는 크게 와 닿지 않았을지 모른다. 나의 라트비아인 친구도, 처음 인간관계를 맺기 시작한 내가 자신의 속보다는 겉모습을 보고 예쁘다고 좋아했으니 조금은 난감한 생각이 들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예쁘다'소리가 나에게 족쇄가 된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예쁘다'는 소리를 하고, 듣는 것에 익숙해졌다 보니 '예쁘다'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에 묶여 산 건 아닌지. 사람 사이에 살면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의 인격체인데도 언제부터인가 겉모습에 너무 연연한 나머지 그 속을 들여다보는 걸 소홀하지는 않았는지.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라는 건, 사용하면 할수록 나도 모르게 그 말에 종속되게 만들 때가 있다. 비속어를 많이 쓰는 아이들의 어휘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예쁘다'라는 말을 좋아하던 나는 다른 장점을 찾아 칭찬하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갔던 건 아닐까.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외모 칭찬을 멈췄다. 대신 다른 칭찬거리를 찾고, 더 자주 칭찬했다. 외모보다는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이 잘하는 것을,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외모 외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칭찬한다. 가끔은 '예쁘다'라는 말도 사용한다. 다만 외모 칭찬보다는 상황이나 현상을 표현하는데 쓰려고 노력한다. 


내면은 말 그대로 사람의 겉모습 뒤에 숨어있기에, 그 실체를 제대로 보기 힘들 때가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애정을 가지고 지켜본다면 언젠가 그 사람의 진실된 모습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일상 속 정말 사소한 데에서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니까. 나는 겉모습에 시선을 빼앗기 가보다는 그 속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친구들도 특별한 일정이 있는 날이면 이것저것 화장품을 꺼내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차려입는다. 이곳에도 분명 매일 화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글은 유럽과 한국을 비교하는 글이 아니라, 일상 속 '예쁘다'라는 칭찬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야기하는 글이다.


나는 여전히 립스틱을 포기하지 못했다. 다들 별 차이가 없다 말했지만 왠지 입술에 색이 없는 아파 보이는 것 같아 포기를 못하겠다 ^^;



제 글을 읽고 응원해주시는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앞으로도 열심히 글을 쓸 예정입니다. 2021년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하는 일 모두 더더더 잘 되시길 바랍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어색해서 쥐어짜 낸 말은 후회를 남기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