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에 대한 강박을 넘어 나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기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
특히 출근 전 마시는 스타벅스 커피 한 잔, 혹은 퇴근 후 스타벅스에서 가지는 나만의 시간은 내 삶의 낙 중 하나였다. 덕분에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어김없이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받았다. 프리퀀시를 다 모으기도 전에 가장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미리 골라놓고 부푼 마음으로 새 다이어리가 내 손안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웃긴 건 나는 그 다이어리를 고작 삼 주 정도밖에 쓰지 않는다는 거다. 11월-12월쯤 새 다이어리를 받고 신이 나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다가 1월 새 해 일주일 정도 쓰고 방치, 3월 새 학년 일주일 정도 쓰고 방치, 그리고 9월 새 학기 일주일 정도 쓰고 또 방치한다. 그렇게 그 다이어리의 쓸모는 끝이 난다.
새 다이어리를 받으면 처음 사용하기 전에 꼭 방치하고 있던 전년도 다이어리를 꺼내서 어떻게 사용할지 연습을 했다. 새 다이어리에 실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의미 없는 옛 물건이 되어버린 전년도 다이어리에는 척척 아무 말이나 쓰고 그리고 하며 연습을 했다.
새 물건에 흠이 생기는 게 싫었다. 이게 내 강박 때문이라는 사실은 라트비아로 떠난 후 평온한 마음속에서 나를 돌아보며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나는 완벽에 대한 강박이 매우 강했다. 내가 완벽한 사람이었던 건 아니지만 내게 소중한 물건들은 힘없이 완벽하고 예쁜 모습을 간직하길 바랬다. 그래서 처음 사용할 때 애지중지 신중을 기해서 사용했다. 그러다가 실수를 하거나 흠이 생기면 관심이 떨어지고 홀대하게 되는 것이다.
새 다이어리는 흠 없고 완벽한,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 인생은 완벽하지 않았다. 힘든 일도 있었고 실수를 하기도 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지만, 내 마음 한편엔 항상 찜찜했던 기억들로 가득 차있다.
흠이 생기고 낡아버린 다이어리는 나였다.
잘못 쓴 글자와 못생긴 글씨들로 채워져 있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틀린 나.
나는 나를 낡은 다이어리처럼 대했다. 항상 낮추고, 함부로 여기고, 고생을 해야 하는. 항상 희생하는 쪽이 되어야 하는. 그래도 되는 사람처럼 나를 대했다.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소중히 여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땐 미처 몰랐다.
이 강박을 극복하게 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유학 생활을 시작한 후 나를 옭아매는 온갖 생각과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을 했고, 끝없는 다독임과 자기세 뇌 끝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많은 것들을 극복했다. 아마 몸도 마음도 항상 와글와글하고 바쁘던 사회에서 멀어졌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이제 나는 낡은 다이어리가 좋다. 내가 공부해온 흔적, 내 일정들이 빼곡히 삐뚤삐뚤하게 담긴 게 좋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면 내가 그때 참 열심히 공부했지, 내가 이 날 이걸 했지 하는 기억이 되살아나고, 내가 참 열심히 했구나 하는 자부심도 생긴다.
나는 내가 참 좋다. 이제껏 열심히 살아왔고, 이 자리까지 이루어 낸 내가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많은 일들이 겪었고, 매 순간 발전했다. 앞으로는 나를 다독다독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갈 거다. 누구와 비교해도 빠지지 않게 열심히 살아온 똑똑한 나를 더 아껴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