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 삶은 의미가 있다.
나는 이제껏 우리나라 교육이 이끄는 대로 살아온 착한 어린이였다.
이미 성인이 된 지 오래지만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운 삶의 방식은 그대로였다.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그러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고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중압감을 느낀다. 빽빽한 일정에 쫓기다가 주말이 와서 내가 자유롭게 쓸 시간이 생겨도 하루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면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고, 뭔가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가 시간에도 무언가 공부와 관련된 것들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넷플릭스를 볼 땐 꼭 영어로 된 영화나 드라마에 영어 자막을 깔고 봐야 하고, 오랫동안 걷거나 밤에 자기 전처럼 특별히 뭔가를 하기 힘들 때에는 팟캐스트로 영어 뉴스를 듣는다.
쉬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쉬는 시간이라는 단어가 마치 나에게는 공백기, 낭비처럼 느껴지도록 머릿속이 설계되어 있는 것 같다.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나는 매번 같은 루틴을 따라 흐르는 하루를 좋아한다.
포대기에 돌돌 쌓인 신생아처럼 편안함을 느끼고 내가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매번 내가 해야 할 생산적인 일을 찾느라 스트레스받아하는 대신에 나는 정해진 루틴에 맞추어 내가 항상 하던 일상을 살고, 내가 생각하는 생산적이고 보람찬 것들을 한다.
하루 일정이 항상 가득 찬 느낌이 들어야 안정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살고 있는 환경에 큰 변화가 오면 한 달 정도 하루 루틴을 찾아가는 적응기를 거치고 나는데,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비로소 내가 내 생활을 안정감 있게 운용한다는 기분이 든다.
시간을 낭비하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 한심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오스트리아로 교환학생을 온 후 아무래도 이 학교의 정식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좀 더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2차 파동으로 인해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된 지금 나는 더욱더 많은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처음 10월 한 달간은 적응기였다.
수업이 없거나 특별히 일정한 일정이 없으면 뭘 해야 할지 당황스럽고 전전긍긍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어쩔 줄 모르면서도, 내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아했다.
지난 한 달간 적응기를 거치며 한적한 오스트리아의 소도시인 클라겐푸르트에서 나는 소소한 이곳 사람들의 일상을 보았다. 공원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거나 오리나 백조를 구경하기도 하고, 가족끼리 놀이터에 나와 뛰어노는 아이를 지켜보고 그네를 밀어주기도 했다.
항상 목표를 정해놓고 바쁘게 움직이는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는데, 그게 또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할 것 한 가지를 더 정했다.
매일 조금씩 "아무것도 하지 않기."
쫓기며 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 혼자 뒤처지는 것 같고 시간을 낭비하는 한심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내려놓기로 했다.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특히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을 거다.
그냥 그때그때 내 마음을 따라서 가만히 누워있든, 창밖을 바라보든 무엇이든 필요와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시간을 가질 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잘했다고 나 스스로를 다독거려주고 싶다.
쉬는 것도 어떻게 하는 건지 배웠어야 했는데, 나는 조금 때를 놓친 감이 있다.
하지만, 뭐, 가끔은 실수도 하고 늦게 배우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오스트리아 생활이 끝난 두 달 반쯤 후에 나는 좀 더 여유 있게 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