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먼저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선생님, 제가 할게요"
우리 반에는 항상 양보하는 학생이 있었다.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내가 할게, 제가 할게요 하는 학생. 현장 학습 차량에서 누구 옆에 앉을지를 정하는 순간에도 저는 혼자 앉아도 된다고 하며 다른 친구들을 배려했고, 교실의 청소 구역을 나눌 때면 항상 가장 인기 없는 구역을 자원해서 맡던 아이. 매번 다 도맡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중재를 하고 다시 분배해주곤 했지만, 이 학생의 양보는 끝이 없었다.
이미 4년을 그렇게 그 학생과 함께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은, 나중에는 점차 으레 그 학생이 양보하겠거니, 하며 혹시 아쉬운 일이 생기면 그 아이가 양보하겠다고, 혹은 궂은일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하는 눈길로 쳐다보기에 이르렀다. 담임교사의 입장에서 그런 학생이 반에 있으면 참 많은 도움이 되지만, 나는 어쩐지 그 아이를 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면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조금은 더 이기적으로 살라고.
내가 학교를 다닐 적에는 양보와 남을 돕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인보다 집단을 위시하는 애국교육이 인성 교육의 큰 축을 차지하던 때였다. 우리나라는 석유 같은 자원이 없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강점은 인재뿐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나라라는 집단을 위해 우리 개개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고 미래에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다수결은 어디에서나 사용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 방법으로 소수의 의견 정도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무시되어도 이해할만한 일로 치부되었고(소수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존중'되지는 않았다.), 집단을 위해 개인은 기쁜 마음으로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기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혀 손가락질당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양보와 남을 돕는 마음이 내가 가져야 할 자세이고, 더 나아가 타인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언젠가 내가 꼭 이루어야 할 궁극적인 미덕 정도인 줄 알았다. 그렇게 자라고 어른이 되어 마주한 세상은 내가 상상한 모두가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집단과 나를 위해 희생할 어리바리한 누군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마치, '이득은 내가 취할게, 호구는 누가 될래?' 하는 눈치게임이 진행되는 무언가. 모두들 희생은 존경할만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잠깐 의인을 위해 손뼉 치는 척하다가 그 사이 이득을 취해 강자가 된 이의 곁으로 우르르 몰려가버린다. 그 후에 희생한 개인은 덩그러니 벌판에 버려진다.
내가 그 아이를 보며 마음이 아팠던 것은, 지난날 희생과 양보만을 강요당하며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5학년, 초등학교에서는 나름 어른이라며 목에 힘을 주는 나이지만 또 12살, 사람이 80살까지 산다고 생각했을 때 1/6도 못 살아본 어린 나이다. 그 아이의 마음속에도 어린아이 특유의 이기심이나 자신만의 취향이, 소유욕이 있을 것이다.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그 아이가 착하고 모범적인 아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또한 그 아이가 자기 가슴속에 꾹 참고 눌러 둔 것들이 있음을 알기에 슬펐다. 그래서 나는 매번 그 아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네가 하고 싶은 걸 말해도 괜찮아,라고 다독였던 것이다.
담임으로서 나는 남을 희생시켜 이득을 취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또한 선뜻 모두를 위해 너를 희생하는 삶을 살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꼭 너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고 했다. 남을 돕는 것도, 희생하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너를 먼저 생각하고 챙기라고. 가끔은 네가 가지고 싶은 것은 가져 보고, 하고 싶은 것은 해 보고, 편하게도 살아보라고. 네가 행복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행복한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그리고 네 마음이 온전히 편안할 때 다른 사람을 위한 양보도, 희생도 생각하라고 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사회를 위해 희생해 줄 의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또한 그들을 금방 잊어버릴 것이다. 뒷일은 모두 희생한 개인이 져야 할 짐이 된다. 나는 한 학급의 담임으로서 우리 반 아이들이 희생하는 의인보다는 행복한 개인이 되길 바랬다. 남을 밟고 서는 부도덕한 행위는 하지 말되, 그 안에서 네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길. 내가 나쁜 선생님일까. 아이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는 걸까. 이상적인 교육을 택해야 하는 건지 현실적인 교육을 선택해야 하는 건지, 요즘 교사로 사는 건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