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R Jan 13. 2021

내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칭하는 또 다른 말

어렸을 때 가족 외에 내가 애정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친구'라는 이름 아래 정리할 수 있었다. 그만큼 인간관계의 폭이 작았으니까.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엔 늘 붙어 다니던 아이가 있었다. 흔히 말하는 엄마 친구 아들. 가족 외에 소중한 사람은 그 아이 하나였다. 그러다 초등학생이 되고서는 매 달 새롭게 내 옆자리에 앉게 되는 친구가, 중학생쯤 되니 함께 다니는 무리가 내게 소중해졌다. 그래서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해보라고 하면 내 머릿속엔 가족들이 가장 먼저 떠 오르고, 그 뒤로는 친구들, 하고 뭉뚱그려 생각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인간관계를 맺게 되는 스펙트럼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맺어진 인간관계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긴 했다.) 만나는 사람들의 직업도 나이 때도 다양해지며 예전에 친구들과 맺은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만 '친구'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우선, 가족. 그리고 가족처럼 느끼는 동료 선생님들, 못 본 지 최소 1년이지만 여태껏 연락을 이어오는 친구들, 유럽에 온 후 맺은 소중한 인연들까지. 그냥 친한 지인이라고 말하기엔 그 단어에 내 마음이 충분히 표현되지 않는 것 같고, 그렇다고 친구라고 부를 수도 없어 매번 줄줄 나열하자니 너무 길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들을 '내 결혼식에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라고 통용해 부르기 시작했다. 실은 결혼 계획은커녕 내 인생에 결혼식이라는 게 있을지 여부도 불분명하지만, 결혼식처럼 중요한 자리가 생긴다면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 


이십 대 중반을 넘어서며 하나 둘 친구들이 결혼을 하기 시작하고, 직장에서 청첩장을 받으며 여러 결혼식을 다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락 한 통 없던 동기를 사 년 만에 본인 결혼식장에서 재회하기도 했고, 가끔은 부탁을 받고 단체 사진에서 사진 찍히는(?) 역할을 부여받기도 했다. 제법 여러 곳의 결혼식에 참석한 나의 소감은, 어째 제삼자인 내 눈엔 다들 비슷해 보였다는 거다. 주말이면 사람들로 가득 찬 웨딩홀에서 하루에도 몇 팀씩 이루어지는 결혼식은 방문객들에겐 그저 잊으만 하면 한 번씩 찾아오는 일상 중 하나로 보였다. 인생의 중대사 중 하나라는 결혼식도 결국 당사자들에게나 큰 일이었다.


그래서 내 결혼식도 참석한 이들에게는 평범해 마지않는 주말의 약속 하나쯤, '여느 결혼식' 쯤으로 여겨질 것이나, 그래도 내게는 중대사일 결혼식이기에 나는 바라는 것이 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나는 내 옆의 배우자를 향해 밝게 웃고, 우리 엄마 아빠는 눈물을 글썽거리고, 모르는 얼굴로 가득한 하객석 사이사이에 이 순간을 꼭 함께하고 싶은 이들이 앉아있는 그런 결혼식. 나 혼자 평생 기억할 내 인생의 순간을, 내가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빛내주는 그런 결혼식. 그러면, 나는 참 행복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내 결혼식에 초대할 사람들'이라고 지칭한다. 아마 내가 나이가 더 들고 '결혼식을 한다면-'이라는 말을 하기 무색해진다면 그때쯤 되면 '내 장례식장에 초대할 사람들'쯤으로 바꾸어 부르지 않을까. 무엇이든 가장 중요한 순간을 골라 내가 함께하고 싶은 이들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 한 권을 사는 낭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