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밖에서 나의 지식은 무력했다.
"경제학과가 잘 맞을 것 같은데?"
고등학생일 적 어느 학과를 가고 싶냐고 하면 나는 주로 경제학과를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수학을 잘했고 좋아했던 데다가, 사회 탐구 4과목 중 하나로 선택한 경제도 재미있었다. 그래프를 그리는 것도 해석하는 것도 좋았고, '경제'라는 단어 자체도 내겐 너무나 멋진 전문가의 영역처럼 느껴졌었다. 그래서 막연히 나중에 대학을 지원할 때에는 경제학과에 지원해서 더 공부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대학교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과목을 많이 공부할 수 있을 거라는 로망도 있었다. 내겐 영 맞지 않던 영어나 암기 과목들보다 내가 흥미로워했던 것들을 마음껏 배울 수 있을 거라는 로망. 가끔은 교과서처럼 그려진 그래프와 전문 용어들을 놓고 색색의 펜으로 필기해가며 공부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런 나의 계획은 운명의 장난처럼 교대에 지원하게 되면서 그냥 과거의 추억 정도가 되었지만.
교육대학교의 목표는 초등교사를 육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커리큘럼 역시 주로 교과 교육론에 집중되어있다. 물론 교육학과 교양 과목을 배우기도 하지만, 우선 초등학교 전 과목에 나온 실기와, 그것을 어떻게 가르치는지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니까 서예를 배워본 후 미술시간에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에 대해 배우고, 축구를 배워본 후 체육시간에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지를 배우는 식이다. 초등학교 전 과목에 대해 알아야 하다 보니 이 분야 저분야 안 배워 본 것이 없지만, 또 그만큼 그 어느 분야도 완벽한 전문가가 될 수는 없었다.
교대를 졸업하고 내 전공 분야에서 일을 하다 보니 여기에 대한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저것 배운 것이 많아서 좋기도 했다. 미술에 대해서도 좀 알고, 또 악기도 몇 가지 간단히 다룰 수 있고 하니 주변에 알은체 하기도 좋았다. 처음 유학을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교육학에 대해서 공부하다 보니 수업을 듣다 보면 거의 10년 전쯤 배운 내용이 어렴풋이 떠올라 그럭저럭 할 만했다.
교환학생을 오며 상황이 달라졌다. 교환학생 특성상 나는 다른 단과의 수업도 내 필수 과목과 관련이 있으면 수강할 수 있었고, 나는 처음으로 내 관심사와 맞는 수업을 마음껏 수강할 수 있었다. 교환학생 생활을 시작하기 전 나는 그간 못 해본 시간표 고르기에 들떠있었고, 내가 배워보고 싶었던 전공을 공부할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기대와는 달랐다. 대부분의 수업이 처음에는 재미있다가도 점점 내용이 심화되어가면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시작했다. 내가 대학교 어느 시기쯤 조금 배워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용들도 어느 순간 내가 전혀 모르는 내용처럼 느껴졌다. 반면 나와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이미 관련 분야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후였기 때문에(나는 대학원생이기 때문에 대학원생 대상 수업만 수강할 수 있었다.) 어려움 없이 수업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간 쌓아온 나의 교육적 지식은 어디에도 적용되지 못했고,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분야는 전공자들에 비하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었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열등감이 일렁였다. 이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잘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내가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나의 전공에 자부심이 있었지만, 초등학교를 한 발자국 벗어나자 내 지식은 너무나 무력해졌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가르치는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었다.
학생들이 없는 이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없으면 교사도 존재할 수 없는 거구나,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합리화를 잘하는 나는 반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학교 밖의 나는 이토록 무능하지만, 학교 안의 너희들 또한 무능할 것이라고. 혹자는 '그 정도 내용을 가르치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라며 교사의 전문성에 의문성을 제기하지만, 지식의 깊이가 깊다고 그 지식을 남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과목을 잘 가르칠 것인가'와 '이 과목을 잘한다'은 엄연히 다른 분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10년 가까이를 교육이라는 분야만 머물렀기 때문에 고등학생 때 바랬던 경제전문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도 내가 가진 얕고 넓은 지식을 아이들에게 잘 전달하는 기술직 전문가로 살아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