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잠든 사람

(10)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날들

by Zwischenzeit



12년 동안 한 교회를 다니면서 제일 싫었던 건 여름 성경 학교였다. 행사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교회 행사에 동원되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또래끼리 어울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땐 때가 되면 당연히 가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일단 보내니까 갔고, 오라고 해서 갔다. 내게 성경학교라는 건 그냥 교회나 외부 다른 교회로 가서 자고 오는 일이었다. 성경학교 내내 제일 많이 했던 건 일렬로 세워서 찬양하며 율동 하는 것이었는데, 선생님들 몇몇이 뒤에 서서 보고 있어 대충 부르는 척 율동하는 척했다. 더 고역이었던 건 맨바닥에 앉아 설교나 성경 통독을 듣고 있었어야 했는데 미칠 듯이 졸렸다. 고문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면 마지막 날엔 모두 기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중학교 때, 그 해 청소년부 인원수가 아주 많았다. 참여율도 높아서 온갖 부흥회, 찬양회가 기획되었고 합심하여 성경학교는 바닷가로 나가게 되었다.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건 퉁쳐서 말하면 엄마 뱃속에서부터지만 모태신앙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단어로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최초의 기억은 5살 때 할머니 손에 이끌려갔을 때로, 정말, 질.질. 끌려갔다. 어린이 예배실에 끌려가며 자지러질 듯 울고 빌었지만 따뜻하게 안아주거나 집으로 데려가 주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온 가족이 일요일 아침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당연하다는 듯이 교회에 갔다. 일요일 아침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즈니 만화 동산 티몬과 품바가 방영되었다. 늑장을 부리며 만화라도 보고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귀신처럼 교회를 빠지려 한다거나 지체하는 날엔 전화벨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울렸다. 나는 그 전화벨이 두려웠다. 울릴까 봐 두려웠고, 불편한 전화를 받지 않으려면 교회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는 당연하다는 듯이 오래된 뉴 베스타의 시동을 걸어놓고 우리를 기다렸다.


나는 특히 교회의 또래들과 데면데면했다. 활동은 잘 빠지지도 않으면서 대답도 잘 안 하고 말도 원체 없었다. 어릴 땐 할머니나 엄마와 함께하는 교회활동이 더 많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부터는 어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라치면 애들끼리 예배드리라며 쫓아내기도 했다. 뒷목이 잡혀서 쫓겨난 적도 있다. 바깥의 소음을 차단하고 내부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던 두꺼운 문이 내 등 뒤로 느리게 닫혔다. 그날, 교회를 다시는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게 예배는 고요함과 정숙함이었다. 길고 오래된 나무 의자에 붙어앉아 어두운 조도의 예배당을 내려다보며 오르간 소리를 듣고 있으면,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감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밝았던 또래들의 예배당은 뛰며 노래하며 소리치는 곳이었다. 앉아있으면 일어나라 했다. 너무 힘들었다.


언제인가부터 나보다 한 살 많은 못생긴 남자애가 있었는데 1년간 그 애의 표적이 된 적이 있다. 이유는 모른다. 어느 날 나타나서 휘젓고 다녔다. 한번은 다 같이 어울리면서 게임을 하자고 해놓고 내가 걸리면 유독 더 가혹하게 벌칙을 시켰다. 여드름 핀 얼굴이 낄낄 댈 때마다 진절머리났다. 중학교 땐 예고 입시를 핑계 삼아 교회를 내내 빠지다가 할머니의 부탁으로 가끔 참석하곤 했는데 내 얼굴을 보자마자 했던 말은 “너 따위가 예고에 붙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였다. 그런 류의 말들을 교회 안에서 들었다.


바닷가 쪽 민박에 도착해서 큰 방 두 개 중 아무 데나 가방을 던져놓고 바닷가로 나갔다. 그해 여름성경학교는 웬일인지 언니가 함께 가달라 해서 갔던 성경학교였는데 도착하자마자 후회했다. 겨드랑이털도 안 밀었을뿐더러 물에 빠지면 샤워해야 하는데, 공동샤워장이었다. 교회 애들한텐 벌거벗은 몸을 보여주기가 싫었다. 물에 들어가지 않고 기울어진 모래사장에 앉아 탁한 색을 띄는 서해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찰나의 시간 손발이 짐승처럼 붙들려서 바다에 거꾸로 처박혔다. 문제는, 정말 문제는 나오려고 하면 누군가 계속 못 나오게 머리를 눌렀다.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됐다. 잡히지 않는 물이라도 잡으려고 손을 휘두르다가 그 손이 떨어져 나갔을 때 고개를 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씨발!” 바다와 해변에 있던 선생님들, 전도사님, 애들이 내 쪽을 쳐다봤다.


그 교회를 다니는 동안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를 거치면서 늘 껄끄러웠다. 아빠는 꼬박 일요일마다 가족들을 교회 앞에 내려두고 혼자 휭하니 떠났다. 왜 그렇게 데려다 주는 것에 열심이었는지, 할머니가 기뻐하실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건지, 그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려고 한건지. 세세하게 떠올리니 그때의 원망만 다시 시작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전체를 봤을 때 꼭 필요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별로인 일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견줄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순간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겪어야 한다면, 손에 이끌릴 때 죽을힘을 다해서 울고 발악하리라. 미친 듯이 전화벨이 울릴 때 선을 다 뽑아버리고 차에 시동을 건다면 차라리 할머니와 평양냉면을 먹으러 가자고 할 것이다. 그 정도로,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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