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옷을 챙겨입으라고 했다. 아침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다급하지만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근데 옷도 그냥 옷이 아니고 고모들이 돈을 모아 사 준 화려한 원피스였다. 동생이랑 나는 똑같이 빨간 체크 원피스였고, 언니만 회색 체크 원피스였다. 고모 결혼식 때 예쁘게 입고 갔던 내가 가진 유일한 공주풍의 옷이었다. 그렇게 옷을 갖춰 입고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동인천의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 1층에 있는 큰집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거실과 부엌 사이 즈음에 모여있는 친척들이 보였다. 모두 다 무언가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신발을 벗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워낙 어른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통에 우리는 뒤로 물러나 있어야 했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왠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가족들이 하나둘 앉기 시작했고, 드디어 원의 가운데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노할아버지였다.
노할아버지는 누워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흰 수건에 물을 묻혀 노할아버지 얼굴을 닦고 있었다. 꾹꾹 진하게 닦기도 하고 닦았던 곳을 다시 닦기도 했다. 할머니 얼굴을 살폈는데 어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가족들은 아무 말도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노할아버지가 뭐라 뭐라 말하자 갑자기 아빠가 가까이 가보라고 밀었다. 주변 어른들도 모두 다 어서 가보라고 했다. 나를 부른 건 아닌 것 같고 우리 세 자매 중 누구든 한 명 가봐야 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 손 만져드리라 하고 얼굴을 내어드리라고 했다. 쭈뼛대면서 가만히 있었더니 노할아버지가 손을 만졌다. 아빠가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있었던 노할아버지가 없어지고 나서 원래 그랬던 것처럼 생활했다. 이후 노할아버지가 쓰던 방엔 큰할아버지가 들어가 있었다.
노할아버지는 내게 그냥 노할아버지다. 아무도 왜 노할아버지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할머니가 그렇게 불렀기에 당연하게 여겼을 뿐이다. 노할아버지의 아들은 큰할아버지이고 딸이 할머니인 걸 나중에야 알았다. ‘노’를 붙이는 것은 왕 어른 같은 느낌인가보다, 했다. 노할아버지와의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히려 큰할아버지가 나를 많이 예뻐해 줬으며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그래도 노할아버지가 있기에 큰집과 가족들, 수많은 만남들이 있었다. 내 머릿속의 장면들에만 존재하는 없어진 집 두 곳 중 하나가 바로 노할아버지가 중심이었던 큰집이다. 나는 집의 구조, 톤, 냄새, 가구들, 장판에 있는 자국까지 기억할 수 있지만 가끔은 그런 집이 있었는지도 까먹고 살게 된다. 이렇게 갑자기 그날, 그 시기를 떠올리게 된 건 얼마 전 집으로 들고 온 오래된 사전에 끼어있는 메모 중 하나 때문이었다. 할머니 글씨체와 비슷해서 뭘 쓴 건지 들여다보고 있는데, 아빠가 노할아버지 글씨라고 알려줬다. 변혜숙, 변혜숙, 변혜숙... 한글과 한자가 휘갈겨 쓰여있었다. 우리 가족 중에 변혜숙이라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언니나 나의 것이 될 뻔했던 이름이라고 알려주었다. 언니와 내 이름은 노할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다.
노할아버지의 빈자리가 생기고 나니 큰집에서 교류하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가족들은 이런저런 일들로 각자의 삶을 찾아 나갔다. 할머니는 그 공백을 할머니의 집에서 채워보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우리가 커가는 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대로를 유지하고 지키려고 했다. 노할아버지가 많이 그리웠을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