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할머니 방에는 큰 장롱이 두 개나 있었지만 어떤 물건이 있는지도 할머니 본인조차 잘 모르는 듯했다.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물건, 손톱 깎는 가위와 계절별 옷, 알 수 없는 약 상자들이 같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안의 물건들이 무질서하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중요한 물건은 늘 끌어안고 다니는 가방에 있는 편 이어서 가족들도 장롱 안의 물건을 딱히 궁금해하는 편은 아니었고, 어쩌다 그 안에 있는 녹슬고 거대한 틴케이스가 궁금해지면 그때야 열어보았다. 장롱 위에 여러 상자가 있었는데 그것들은 다른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하지 않았다. 그것을 궁금해 하는 이는 오직 나뿐이었다. 그 중 한 상자는 사진이 잔뜩 들어있었는데 최근엔 그 상자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사 올 때 솎아내 버린 짐 속에 무심코 섞여버린 것인지.
사진이라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손을 타게끔 열어보면 망가져 버리기 쉽다. 일례로 우리 집 앨범 속 사진들이 그렇다. 우리집엔 엄마, 아빠, 우리 세 자매 각 앨범이 있는데 첫째였던 언니의 앨범이 개수가 많고 내용도 풍부하다. 물론 막내의 앨범이 가장 빈약하다. 필름 사진기 하나를 손에 얻고 나서 느낀 건 생각보다 들고 다니기도, 포착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순간들은 너무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런 장면들을 모아 인화를 하러 가면 많은 돈이 들었다고 엄마는 회상했다. 우리 가족들은 모여있을 때 누군가가 앨범을 꺼내오면 이미 수없이 봤던 것이더라도 재밌게 보곤 했다. 그 사진들이 늘 익숙했다. 그래서 그다지 소중하다는 느낌이 없었던 걸까. 초등학교 때 가족신문 만드는 데에 가차 없이 사진들을 가져다 썼다. 엄마를 소개하기 위해 엄마의 젊은 날 얼굴을 오려서 붙였으며 아빠의 사진은 몇 없는데도 우리가 아기일 때 함께 누워있던 사진의 얼굴을 사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깝다.
그래서 어쩌면, 정말 소중하다면 필름에 새겨 장면을 남기고 열어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장롱에 있는걸 알지만, 가족사진이 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없다고 했다. 할머니가 잠들었을 때 이미 몇 번이고 열어서 봤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미 버렸고, 있어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이미 가고 없거나 전쟁 중에 원치 않게 헤어져서 가슴이 아파 사진을 보기 싫다고 했다. 그래서 남아있는 사진들을 버리려는 걸 말린 적이 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지나간 아름다움은 사람을 슬프고 나약하게 만든다.
수많은 흑백사진은 뽑아낸 지 얼마 안 된 듯 빤빤하다. 정지된 풍경의 중후하고 단호한 흑백에서 느껴지는 스펙터클이 있다. 사진들은 보관상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주로 티슈나 유산지에 한 번씩 쌓여있어 사진을 늘어놓으려면 포장을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풀어야 할 정도다. 버리라면서 정작 그것들은 너무 소중하게, 중요하게 싸여있었고 빛에 바랠 새라 깊숙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사진 속 인물들은 내가 알 수 없는 인물들이 9할이었다. 언제는 노할아버지 얼굴이 너무 젊어서 누군지 못 알아 본 적도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은 내가 동경하는 시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진하거나 연하거나, 정갈한 매무새의 옷, 웅장함이라곤 없는 건물과 방의 크기, 소박함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결혼식. 각잡고 찍은 단체사진엔 경직된 표정이 역력했지만 잔치나 일상에서 갑작스럽게 찍힌 사진들은 모두 역동적이었다. 사진 뭉치는 약통이었던 찌그러진 틴케이스에 소중하게 보관되어있다. 남은 덩어리는 이것 뿐인 것 같다. 나머지 장롱이나 비워진 삼촌 방, 무거운 광주리로 막혀있는 서랍장 을 뒤적거리면 무언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로 누워 아기처럼 잠든 할머니 옆에서 짐들을 엎을 수가 없다. 무엇을 찾겠다는 일념이 도둑과 다를 게 무엇인가. 자주 꺼내 보고 들여다보면 장면들은 사라진다.
근래 흑백사진 통을 자연스럽게 꺼내 만지작거리는 내게 할머니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너가 가져가라고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이유는 그럴 수 없어서다. 말했다시피, 등장 인물들도 누가 누구다 줄줄 말하는 건 할머니 뿐이고 아빠조차도 설명하지 못한다. 내게는 가족들의 사진이라기 보다 역사서에 새겨진 사진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나는 이 사진의 소유권이 없다. 즉,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이 물건을 택하기도 하지만 나보다 훨씬 이전에 탄생했던 물건은 이미 주인이 정해져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이번엔 오브제에서 해답을 구하지 않았다. 상징에서도 구하지 않으며, 이젠 나의 피부로 느낀 것들만이 꺼내어 보여줄 수 있는 때라고 믿기 때문이다.
작업에 등장시키거나 재현하지 않는 이유는 그저 이용할 만한가? 이미지가 될만한가? 의 물건으로 바라보는 것이 결국 그 주인인 할머니를 바라보는 것처럼 여겼던가, 그럴 것 같은 위기감에 얼른 빠져나오고 싶었던 이유도 있다. 유산지에 쌓여있기만 한 사진이 아깝다고 생각한 건 그것을 활용하는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만큼 할머니의 물건들, 사진들을 보물처럼 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내가 발견했을 때 싸인, 덮인 그 상태가 그 물건의 운명일 수도 있지 않은가. 바라보여지지 않는 사진들도 존재하는 법이다. 마음에 묻을 때까지 그렇게 거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물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