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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헨님 Mar 20. 2022

메일함을 열면서 생각한 것

매일매일, 들고 나는 인연과 업무가 있었다.

Sent mail 폴더 안 내용물이 몇 주째 그대로였다.

요즘 메일을 보낼 일이 이렇게 없었다니, 순식간에 외로움이 차올랐다. 업무가 대체로 사내 메신저로도 충분했다는 건데, 그게 ‘공식적이고 대외적이면서도 주요한’ 업무에서 빠져있다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참조에 팀장님을 넣고 수신에는 유관부서의 담당자들을 빠짐없이, 내용이 분명히 전달되는지 한눈에 잘 읽히는지 줄 간격까지 고려하는 발신을 한지가 언제였지.


 몇 달 전, 몇 년간 담당해 온 업무를 놓아주어야 했다. 예측하지 못한 인사 이슈에 조직은 신속한 결정을 내렸다. 듣고 놀라고 받아들이는 것만 할 수 있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내 잘못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 명이 한 파트가 되어 맡았던 콘텐츠를 이제는 외주제작사가 담당한다고 들었다. 나만큼 해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다. 함께 일하던 팀에서 처음엔 아쉬워하고 불편해하던 변화가 이제는 자리를 잘 잡은 모양이다. 내가 잡았던 레이아웃이 살짝 변형되어 꽤 근사하게 발행되고 있다.

 

 업무뿐 아니라, 파트의 멤버들도 회사를 떠났기 때문에 한동안 팔다리가 잘린 기분으로 지냈다. 상처받았다는 핑계로 긴 휴가나 다녀올까 했다. 비실비실 느슨한 상태는 며칠을 못 갔다. 팀장님이 새 희망을 발견한 듯 목소리를 높이며 새 업무를 내리어 주셨기 때문에. 이거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고, 너만큼 잘할 사람이 없다! 너는 카피 쓰는 걸로 우리 회사 세 손가락 안에 든다! 사업부 3대 미션 중 하나인데 잘 해내면 S등급을 주겠다! 내적 동기의 씨앗을 노련하게 심어주는 팀장님. 그리하여 지금처럼 자리에 앉아 단순한 반복 노동을 하게 된 것이다.


 영상을 편집 프로그램으로 잘라서 하이라이트만 짧게 요약하고, 위아래 최대 6자씩 홀리는 문구를 생각해내 포토샵으로 섬네일을 만들고. 시즌에 맞는 테마를 정해 타이틀을 달아 전시하기. 얼른 해치우려고 몇 시간을 완전히 몰입하다가 벌떡 일어나 파스를 받으러 가기도 한다. 외근도 없고 미팅도 안 하니까, 요즘 너무 어깨가 뭉친다. 아고고…


 “다헨님은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좋아하는군요!”

 가까운 미래의 프로젝트를 도모하는 J는 말했다. 맞아요, 나는 창작을 즐기지요. 비주얼 콘셉트를 짜고 콘티를 쓰고 촬영장에서 마주하는 모든 과정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특히 촬영을 정말 좋아해서 현장에서 팔짝팔짝 뛰고 꺄르륵 웃느라 매 순간 흥분 상태일 정도.


 그런데, 요즘 내 업무는 혼자,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일이 전부다. 이것도 나름 창작하는 일인데 왜 요즘 재미가 없었을까? 주목받은 만한 사이즈의 일이 아니라서? 아니, 그건 아닌데.


 나는 동료가 그리웠다.

그냥 같은 팀원 말고, 출근하자마자 후다닥 달려가서 사소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싶은. 애매할 때면 이건 어떤 거 같냐고 언제든 붙잡고 물어볼 수 있는. 때로 다 내던지고 땡땡이를 치기도 하는 일체감, 안정된 결속, 말이 필요 없는 공감대를 가진 내 작업 크루 말이다. 나는 자막에 사소한 개그를 쳤다가도 누가 볼까 훌훌 지워버리기도 하곤 했다. 이거 괜찮아?라고 가볍게 물어볼 수 있는 동료가 없어지다니.  



 떠나는 사람은 자꾸 생긴다.

요즘 들어 In box에는 퇴직인사 메일이 더 자주 도착한다. 어디서 베낀 듯한 말들로 스크롤을 내리지 않아도 될 만큼만 적당히 채운 분량, 답장을 바라지 않을 단체 메일. 가장 최근에 열어본 메일에서 마지막 줄이 기억에 남았다.


 ‘퇴사하면 계열사 직원 할인이 가장 아쉬울 줄 알았는데, 막상 마지막 날이 되니 주변의 좋은 동료들을 앞으로 못 뵙는다는 게 더 아쉽네요.’


  사람들을 할퀴려고 회사에 오는 것 같았던 그녀는 출근 마지막 날 내 자리에 찾아왔었다. 이어폰을 끼고 편집 중인 내 옆으로 와서 바쁘냐고 물어보던 그녀. 뒤에서 나를 비난한 말들을 누군가 구체적으로 재현해 날랐고, 나는 듣고 싶지 않았지만 알게 되었으므로 그녀가 무서웠었다. ‘쟤만 승진하고 내가 안 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회식 때 울었다기에, 승진 발표가 공지된 날에는 저주의 말들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늘 비뚤게 비트는 입술, 쾅쾅 치던 키보드, 힘주어 치켜뜨는 눈. 분노의 기운으로만 느꼈던 존재를 아주 오랜만에 가까이 마주 보았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이직이 아니라 이제는 쉬고 싶어서져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 경력직으로 입사한 그녀는 사무실 안에서 너무 힘을 주고 지냈던 게 아닐까. 아마 더 잘하고 싶어서, 증명하고 싶어서 매 순간 전투하는 마음으로 사느라 거슬리고 걸리적거린다고 느껴지는 게 많았을지도 모른다.


 “예전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후회가 돼요.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데, 볼 때마다 웃으며 인사해 주어서 고마웠어요.”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기에, 눈이 곧바로 촉촉해지려고 했다. 그건 회사 안에서 흔치 않은 진심이었으므로 소중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런 식으로도 정리되는 인연. 마음먹고 만나러 갈 날은 이제 영영 없겠지.


 딱 이만큼만 알다가 멀어지는 사람들, 너무너무 사랑하다가 놓아준 업무들이 있다. 이미 확인한 메일처럼 그저 뒤로 뒤로 밀려나다가 그냥 잊히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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