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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Apr 12. 2023

25. 애환의 마지막


 누군가 곤히 자던 나의 팔을 거세게 흔들어 깨웠다. “형 5시야.” 반쯤 뜬 눈과 반에 반도 안 깬 멍한 정신으로 바라보니 ‘재’동생이었다. 난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싶어 정말 “어쩌라고?”라 대답하고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순간 “아!”하고 일어나 한 달간 몸에 밴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침낭을 말았다. 


 마지막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불과 5km 거리의 ‘몬테 도 고소(Monte do gozo)’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우리는 동이 트기 전 도착해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과 함께 산티아고 대성당을 맞이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직 ‘묵시아(Muxía)’와 ‘피스테라(Fisterra)’까지의 여정이 남았음에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산티아고를 가리키는 화살표, 가리비 하나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어찌나 아쉽던지. 가슴에 가진 별을 하나씩 잃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쉬움의 발걸음 끝에 마침내! 끝끝내! 드디어! 기어코! 파이널리!  도착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우리는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환호를 질렀다. 산티아고 대성당은 지금껏 보아온 성당과는 다른, 그야말로 끝판왕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는 성당이 한눈에 들어오는 거리에 배낭을 내려놓고 드러누웠다. 이 드넓은 광장에 존재하는 건 오직 우리와 산티아고 대성당뿐이었다. 대성당 뷰 광장을 전세 낸 기쁨에 더해 축제 전야제에서 선보일 레이저쇼 시연까지 구경하는 천운을 누렸으니(왜 천운인지는 뒤에서 알게 될 것이다). 이른 아침 부지런을 떤 보상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산티아고 대성당을 구경하는 사이 서서히 날이 밝고 광장의 모습도 변해갔다. 조금씩 많아지는 사람들에 어느새 새벽의 고요는 사라지고 점차 활기의 온기가 퍼져갔다. 빛과 에너지가 바뀌자 마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 듯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성당만은 굳건했다. 실제로 그러했듯 주위가 변하고, 시간이, 세월이, 역사가 흐르는 동안 이 자리에 버티고 있었을 성당.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바로 이 굳건한 믿음을 보기 위해 세차게 걸어온 것인가 싶었다. 


 산티아고는 전야제를 위해 수없이 몰려든 순례자들로 북적였다. 낮보다 뜨거운 밤. 길을 마친 순례자들과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는 기쁨과 해방감으로 들떠있었고, 불꽃놀이가 펼쳐질 자정이 가까워짐에 분위기는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거리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안개가 자욱한 거리에 보이지 않는 뱀이 기어다니는 불길함. 행복한 기운으로 가득했던 거리 곳곳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길한 기운은 곧 나에게까지 미쳤다. 


 불과 몇 시간 전 기차가 탈선하는 사고가 일어났던 것이었다. 무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은 큰 사고에 불꽃놀이와 레이저쇼 등 예정됐던 행사는 모두 취소되었다. 사람들을 건너 건너 사고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고 거리는 점차 가라앉았다. 


 다음날 완주 증명서를 받기 위해 찾아간 순례자 사무소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은행 창구에서 통장 만들 듯 이뤄지는 절차에 벅찬 감동이나 신성함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동안 걸은 길에 대한 공적인 인증을 받았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증명서를 받고는 산티아고 대성당 미사에 참석했다. 그동안 순례길을 걸으며 빈 성당에서 잠깐잠깐 홀로 기도만 하고 나왔을 뿐이었지만 순례자로서, 여행자로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의 미사는 한 번쯤 참석해보고 싶었다. 단상에 올라선 신부님과 성당을 가득 메운 신자들, 오르간 연주와 사람들의 목소리에 성당의 완전한 모습을 마주하는 듯했다. 


 미사는 기차 탈선 사고 추모가 주를 이뤘고 성당 앞에는 추모객들이 놓고 간 꽃과 초가 점차 쌓여갔으며, 12시에는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1분간 묵념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후 일행의 귀띔으로 알게 된 성 야고보 동상의 어깨를 만지는 의식을 위해 갔지만 긴 줄에 포 기했다(이후 피스테라까지 완주한 후 돌아와서 성공했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밤에 우리는 한데 모였다. 나처럼 보너스 스테이지와 같은 묵시아와 피스테라까지 가는 사람도 있는 반면 대부분은 산티아고를 마지막으로 일정을 끝낸다. 그렇기에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마지막 밤. 모두가 이날이 오리라는 걸 알고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아쉬움과 허전함은 전혀 상쇄되지 않았다. 우리는 둘러앉아 와인 한잔을 나누며 순례길을 걸으며 느낀점을 말하고 진실게임도 하며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조금 더 깊은 대화와 솔직함을 나눴다.  


 내 인생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보낸 여름은 환희와 애도, 기쁨과 슬픔, 후련함과 아쉬움, 세상 모든 감정이 뒤섞인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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