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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May 04. 2023

05. 말 없는 이별

트레킹 일지 Chap.3 하늘을 향한 길, 안나푸르나 트레킹


 우리는 언제 어디고서든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인연의 끈을 맺고, 그중에는 다른 끈보다 두껍고 질긴 특별한 인연이 생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맺은 수많은 인연 중 특별한 존재가 생긴 것처럼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에도 특별한 인연이 생겼으니. 이와 같이 특별한 인연은 결코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으며, 우리를 둘러싼 상황과 개개인의 성향, 그리고 약간의 운이 조합돼 희박한 확률을 뚫고 만들어지기에 값지며 소중하다. 


 이 친구들을 처음 만난 건 산에 들어선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바가르차프(Bagarchhap)’의 식당에서였는데, 스페인 부부와 함께 온 가이드와 포터였다. 수일을 지속해야 하는 산행에 길을 안내하고 돌발상황에 따른 안전을 책임져줄 가이드와 짐을 들어줄 포터를 고용하는 등산객들이 있다. 이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지만,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결코 만만치 않은 히말라야를 오르는 상황에 충분한 가치를 한다. 물론 우리가 전문 산악인처럼 생사를 위협하는 고도나 험한 눈길을 뚫고 가는 건 아니기에 어느 정도 체력에 자신만 있다면 나처럼 홀로 산을 오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처음에는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소재를 시작으로 스페인 부부와 얘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점차 부부와 함께 있던 네팔인 가이드와의 대화가 많아졌고, 스페인 부부가 방으로 간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갔다. 네팔에 대한 궁금증이 많은 나였고, 이런 내 궁금증에 성심성의껏 답을 해주는 가이드였다. 그리고 포터 친구는 말이 없었다. 이유는 말을 못하는 언어 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은 못 했지만, TV에 나오는 배우들의 표정을 따라 하거나 환히 웃으며, 말없이도 우리와 함께 웃으며 소통하였다. 


 그렇게 첫 만남이 있은 후 이틀 뒤 다시 그들과 마주쳤다. 길에 앉아 쉬고 있는데 스페인 부부가 길을 지나쳤다. 부부는 나를 보자 “부엔 까미노(Buen camino)!”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인사를 건넸다. 나 역시 그들에게 “부엔 까미노!”하고 화답했다. 잠시 후 가이드 친구가 나타났고 나를 보자 “헤이, 프렌즈~”하며 인사해줬다. 정감가는 인상에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가이드 친구. 그렇게 스페인 부부와 가이드 친구까지 지나쳐 보내고 한참 후에야 머리에 짐을 한가득 이고 오는 포터 친구를 만났다. 나는 그를 보곤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친구는 어마어마한 짐을 이고도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록 말은 못 하지만 그의 미소는 항상 소리가 나는 듯했다. 난 그에게 물을 권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미소를 유지한 채 내가 건넨 물을 마셨다. 그리곤 또다시 힘차게 짐을 들어 올려 머리에 이고, 허리를 굽히고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길에서 마주쳤으며, 그때마다 함께 걸으며 시간을 쌓았다. 한번은 가이드 친구가 너무 나와만 함께 걷자 스페인 부부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사실 그들을 고용하고 임금을 지불하는 건 스페인 부부이고 그들은 길을 걸으며 길 안내와 더불어 산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듣길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놈이 하루 종일 나랑만 붙어있고 자기들을 등한시하니 기분이 언짢을 만도 했다. 난 그런 부부의 눈치를 보고 가이드 친구를 살살 떼어놓으려 했으나 이 친구는 그런 부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계속해서 내 옆에 붙어있어 오히려 내가 다 좌불안석, 불편한 산행이 되기도 했다. 


 이 친구들은 길 내내 함께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만날 때마다 얘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으며 정말 편한 오래된 친구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친구들과의 마지막.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의 최대 고도인 ‘쏘롱 라(Thorung La)’를 지나면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끝내고 버스를 타거나 ‘좀솜(Jomsom)’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카트만두로 돌아간다. 물론 나는 계속해서 걸어 나갔고, 사람들을 태우려는 버스가 가득한 마을에 들어섰을 때 그동안의 길에서와는 다른 북적거림에 살짝 혼란스럽기도 하며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때 나의 시야에 누군가 눈에 띄었다. 버스 창문에 상반신 전체를 쭉 내민 채 힘차게 손을 흔들고 있는 포터 친구! 난 그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앞으로 내달렸다지만 버스는 곧바로 출발하고 말았다. 버스가 떠나고, 친구도 사라지고 나자 문득 그 친구가 얼마나 오래 손을 흔들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사람 같았으면 한 번 소리쳐 부름으로써 해결했을 일을 내가 자신을 봐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울컥한 마음이 솟구쳤다. 아마 나의 여행에서, 아니 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이처럼 아름답고도 슬픈 이별이 있을까. 부디 그 친구의 웃음이 아직도 히말라야의 깨끗한 눈처럼 빛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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