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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May 08. 2023

06. 고산병

트레킹 일지 Chap.3 하늘을 향한 길, 안나푸르나 트레킹


 이전에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 ‘리키안 웨이’와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의 가장 큰 차이라 하면 바로 고도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겪게 되는 고산병! 예전에 ‘안나푸르나 ABC’ 코스를 다녀온 사람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누나는 일주일도 안 되는 일정으로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만 갔다 왔는데, 그 며칠 동안의 기억이 거의 없다고 했다. 고산병으로 인해 산을 오르는 내내 술에 취한 듯 멍한 상태였고, 계속해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행들의 모습만 기억에 남아있다고 했다. 누나는 그래도 비싼 돈 들여서 왔기에 이 악물고 끝까지 완주했지만, 결과적으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며 웃었다. 


 난 ‘고산병이 도대체 뭘까?’라는 막연한 불안감과 동시에 비행기를 탈 때면 겪는 귀가 먹먹해지는 현상 정도겠거니 하며 가볍게 치부했다. 그리고 사실 수 많은 사람들이 무탈하게 산을 다녀왔기에 나 역시도 언제나 다수의 편에 서 있는 극히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큰 탈 없이 고산병을 넘길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건강을 끔찍이도 챙기는 자기애 충만한 겁쟁이로서 하루에 500m 이상 오르지 말라는 가이드들의 지침을 잘 따르며 충실하고도 수월한 산행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의도치 않게 옆방 남자의 말을 엿듣게 됐다. 옆방의 숨소리마저 바로 옆에서 나듯 들리는 최첨단 스테레오를 장착한 방의 특성상 의도치 않은 도청. 남자는 자신의 가이드에게 머리가 띵해 서 하루 더 쉬어가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난 옆방 남자의 징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훗, 나약한 녀석 같으니’하고 비웃었다. 그리곤 씩씩하게 배낭을 꾸려 밖으로 나섰다. 오늘도 역시나 상쾌한 히말라야의 공기를 들이마시니 고산병이고 뭐고 그런 게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왜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렇게 호기롭게 길을 나선 지 한 1시간쯤  됐으려나? 머리가 슬슬 어질어질한 게 강도가 점점 진해지니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옆방 녀석 옆에 얌전히 누워 하루 더 머물렀어야 했나? 이런 제길! 지금 와서 돌아갈 수도 없고, 옆방 녀석의 나약함에 더해 1시간 느리게 반응하는 굼벵이 같은 몸뚱이를 가진 나였다. 어쨌든 이미 길에 발을 붙인 이상 낙장불입落張不入임에 어떻게 해서든 나아가야 했다. 중간중간 쉬면서 전날 사둔 사과를 먹었다. 그러자 조금씩 기운을 회복해가며 간신히 다음 마을 ‘마낭(Manang)’까지 이를 수 있었다. 


 롯지에 도착해 식사 메뉴를 살펴보니 야크 스테이크가 눈에 띄었다(히말라 야의 트레킹 코스나 ‘포카라(Pokhara)’ 같은 일부 관광지에서만 야크고기 판매가 허용된다). 그동안 달밧에 감자만 먹어댔으니 단백질이 필요할 만도 했다. 가격대가 좀 있었지만 지금 나의 몸은 강렬하게 고기를 원하고 있었다. 자고로 몸이 아플 땐 잘 먹어야 하는 법. 오늘까지 돈을 아꼈다간 그대로 신의 곁으로 갈 것만 같아 큰맘 먹고 스테이크를 질렀다. 철판에 자글자글한 소리와 함께 연기를 뿜으며 나오는 야크 스테이크에서 성난 야크의 힘이 느껴졌다. 


 그래 이거야! 고기는 질겼지만, 단백질 섭취의 맹목성으로 마구 씹어 삼켰다. 오랜만에 맛본 고기 맛에 어질했던 머리도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역시 고기는 만병통치약인가?). 그렇게 궁금하던 고산병의 증상을 온몸으로 깨닫고 하루를 더 쉬어갔으며, 이후 최고도인 ‘쏘롱 라 (Thorung La)’를 앞둔 하이캠프에서는 잠자다가 깨어날 정도로 심장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다행히 심하진 않았지만, 한밤중에 잠에서 깬 나는 순간적으로 아찔한 공포에 휩싸였다. 이 산중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손쓸 방도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창밖으로 들이치는 달빛이 너무도 서늘해 보였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사실 그렇게 심각하지도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나의 가녀린 심장 녀석이 급발진할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호흡 한 번, 한 번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렇게 심장이 좀 안정됐다 싶어 다시 누웠지만, 다시금 조여오는 심장과 어지럼증에 다시금 일어나 앉기를 반복. 누구 하나 돌봐줄 이 없는 이 쓸쓸한 산 속의 밤이 참으로 많은 생각과 고독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나의 나약한 몸뚱 이는 적당한 고산병까지 겪으며 히말라야에서 체험할 수 있는 웬만한 경험을 모두 선사했다. 내 인생 (지금까지)처음이자 마지막 고통의 감각. 혹시라도 안나푸르나를 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고산병을 가벼이 여기지 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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