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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May 12. 2017

이제 미워하지 않을게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이 글을 쓸까 말까 망설였다. 꼬박 7년간, 월급쟁이 글쟁이로 신문사에서 일했지만 글로 나를 100% 표현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서툴다. 하지만 영상과 사진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내 감정과 생각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도구는 여전히 글이다.



망설였던 글의 주제는 퇴사다. 직장 초년병일 땐 사표를 멋지게 던지고 세계 여행을 하는 꿈을 꿨다. 처음엔 그게 참 멋지고 간지난다고 생각했다. 교보문고 여행책 코너에는 대기업을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세계여행을 한 용자들의 책들로 넘쳐났다. 도대체 저들의 용기는 어디서 샘솟는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의 모든 말단 직원들은 상사 스트레스를 받을텐데 "짜증난다"는 이유로 사표를 쓰기엔 명분이 부족했고, 배짱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명분과 배짱, 자금력 '퇴사 조건 쓰리 콤보'를 갖추지 못하고 뒤에서 회사 욕이나 하는 나약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사표를 냈다. (사의를 표명했다가 더 알맞겠다) 그 이유는 조금 있다가 밝히기로 하고, 다음달부터 'No Income Life', 이른바 백수다. 난 서른이 되면 내 인생에 대단한 일이 벌어지는 줄 알았다. 결혼 적령기인 20대 후반 서른 무렵 교제하던 이성과 결혼하고, 애를 하나쯤 낳고, 육아휴직을 쓰고, 그럭저럭 세상의 인생 속도에 맞춰 살아가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혼할 줄 알았던 남자와는 20대 중반에 헤어졌고, 그 남자는 "한창 꽃다운 나이에 오래 붙잡고 있어서 미안했다"며 펑펑 울더니 1년 뒤 결혼해 애를 낳고 3인 가구가 됐다. 겁나 열 받았다. 심지어 결혼하기 몇 달 전 연락해 "수영아, 나 결혼해"라고 알려주기도 한 지나치게 친절한 남자였다. (남자들이 헤어진 뒤 "이제 여자한테 관심없어"라고 하는 말은 다 구라다. 결혼이 목표인 남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더 빨리 목표 여성을 찾아 움직인다.) 한번은 술 먹고 열받아서 구남친의 웨딩 카톡 프사를 보고 "오빠, 니 손 너무 어색해. 별로야"라는 카톡을 보낸 적도 있다. 후회는 없다ㅋㅋㅋㅋ

   

그 후로 내 인생은 싱글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비혼'은 아니지만 결혼은 목표가 아니라 옵션이 됐다.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좋아하는 것이 뭔지, 그것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준비하고 희생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계산하는데만 3년이 걸렸다. 물론 이후에도 간간히 연애했고, 좋은 놈, 그지같은 놈도 만났다. 그들 중 "니가 미친듯이 좋으니 결혼하자"고 달려드는 놈은 없었고, 나 역시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빠 미안ㅠㅠ 그러니까 남의 자식 결혼식 그만 가세요.)


처음엔 20대 중반 때 펑펑 울며 나를 놓아준 그 남자가 미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의 실패한 연애 덕분에 나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었다. 10년 넘게 살았던 대구를 떠나 '복잡해서' 싫어했던 서울로 왔고, 이젠 서울에서 더 복잡한 곳으로 가려고 준비 중이다. 다음달 신문사를 퇴사하고 영국으로 간다. 내 인생의 도전이 시작된 것은 그 연애의 굴곡 덕분이다. 이제 울보였던 구남친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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