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한 인니어

어쩌다 자카르타

by 수리영

자카르타에서 일하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도네시아어다. 내가 일하는 곳의 공식 언어는 영어지만 상사를 비롯한 인도네시아 동료들이 회의를 진행할 때 인니어로만 소통하는 일이 수시로 발생했다. 특히 인도네시아 정부와 회의하는 워크숍이라도 잡히는 날이면 8시간 동안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인니어를 배경음악 삼아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인니어 때문에 소외감을 겪는 외국인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비 인도네시아인 직장 동료들은 만나면 곳곳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국제기구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것 같다는 좌절감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똑똑한 애들인데도 이곳에서 인니어 때문에 낮아지는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 참 어려워 보였다. 이곳에서 3년간 근무한 다른 부서 일본인 동료는 나의 고통을 200% 공감해주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회의할 때 영어로 해주길 기대하지 말고, 대신 정부 쪽에 영어를 잘하고, 의욕이 넘치는 젊은 직원을 찾아서 잘 지낸 뒤 회의 내용을 요약해달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3년간 인니 생활을 통해 터득한 현실적 조언이었다.


이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무슨 말인지 대충 알아먹어야지 숨이라도 쉬고 살 것 같았다. 인니어를 배우는 것, 그것만이 이곳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고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자카르타 생활 두 달 만에 '인도네시아어 초급반'에 등록했다. 생존 인니어를 배우러 온 사람은 나 말고도 여럿 있었다. 스페인, 미국, 싱가포르, 인도, 캐나다, 오스트리아, 필리핀 등 나까지 포함해 9명이 인니어 초급 저녁반에 등록했다. 그중 2 명은 자카르타에 온 지 2주도 채 되지 않았는데 곧장 인니어 수업을 등록하는 추진력을 뽐냈다. 이들은 나보다 훨씬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었다. 둘 다 같은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는데 현지 직장 동료들이 본인들이 있는데도 인니어로 소통하는 것을 보고 바로 수업에 등록했다고 했다. 이들 역시 영어가 쓸모없어지는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인도네시아어는 한국어, 영어와 비교하면 단순한 언어였다. 과거, 현재, 미래 시제나 1인칭, 2인칭, 3인칭 주어에 따라 동사가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제 밥을 먹었어요, 지금 밥을 먹고 있어요, 내일 밥을 먹을 거예요' 등 시제에 따라 동사가 변하지 않고, 어제도, 지금도, 내일도, '밥을 먹는다'는 동사 하나로 설명이 가능했다. 복수형을 만드는 것도 간단했다. 한 사람은 orang, 사람들은 orang oranag, 이렇게 같은 단어를 반복하면 복수형이 되는 것이었다! 참으로 귀여운 문법이다.


수업은 빠르게 진행됐다. 두 번째 수업부터 숫자 세는 법을 배웠고, 세 번째 수업부터 선생님이 숫자를 불러주면 우리가 영어로 맞히는 게임을 했다. 선생님이 578을 인도네시아어로 말하면 우리가 영어로 다시 말하는 방식이었다. 1부터 10까지도 며칠 전에 겨우 외웠는데 세 자리 숫자를 말하라니, 선생님의 의욕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우리 반에는 숫자에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반 친구들은 막힘 없이 술술 정답을 맞혔고, 내 차례가 되니 괜히 긴장이 됐다. 이게 뭐라고!!! 하지만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버벅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9명 중 나의 학습 속도가 가장 느린 것 같은 좌절감을 느낄 때쯤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스페인 친구였다. 내가 한 번 실수를 할 때 그는 두 번 세 번 실수를 했고, 선생님이 방금 말한 내용도 10초 뒤 또다시 물어보는 건망증이 있었다. 그가 실수를 할 때마다 '내가 꼴찌는 아니구나'하는 나쁜 안도감이 밀려왔다.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리 듯 등록한 인도네시아어 학원이지만 좋은 점도 있다. 직장 밖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외국인끼리 인도네시아 생활의 애환을 공유할 수 있고,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평생 배울 일 없었을 인도네시아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됐다. 10개월 뒤 나의 인도네시아어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누구 말대로 숫자 연습하러 슈퍼마켓에 가야겠다!



다시 학생이 된 기분. 숫자 진짜 안 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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