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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Sep 19. 2017

외로운 유학생들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 런던 히드로 공항버스 정류장에 쭈그리고 앉아 썼던 일기를 먼저 앞머리에 그대로 옮겨 적겠습니다.


2017.9.15 오후 8시 42분 히드로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오후 11시 25분. 브리스톨행 버스가 오려면 아직도 2시간 50분 정도 남았다. 직딩 시절, 국회에서 회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뻗치기를 하는 기분이다. 정류장 의자가 차가워서 비행기에서 덮던 담요를 깔았다. 열린 문으로 바람이 슝슝 들어와서 오늘은 입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유니클로 '방풍 방수' 점퍼를 꺼내 입었다.


어제 출국 준비를 하면서 록이랑 브리스톨행 버스 사전 예약을 두고 짧은 토론을 했다. 우리의 결론은 입국 심사를 통과하면 시간이 지연될 수도 있으니 미리 예약하지 말고 현장에서 바로 표를 사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의 결정이 잘못됐음을 입국 심사를 하는 동안에도 깨닫지 못했다.


입국 심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물론, 영어를 몇 마디 못 알아먹어서 내가 싫어질 뻔 한 순간이 있었다.)

입국 심사 담당 직원은 "공부하러 왔니?" "학기는 언제 시작하니? 무슨 공부하니?" "브리스톨 가면 BRP 꼭 픽업하라"고 몇 가지 당부를 한 뒤 30초 만에 입국 심사를 끝냈다. 그러므로 오후 8시 15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였지만, 내 인생은 항상 계산대로 된 적이 없었으니까ㅋㅋㅋㅋㅋㅋㅋ 안내 표지판을 잘 보고 National Express(우리나라 고속버스 같은 것)라고 적힌 버스 정류장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계획대로 차근차근 이뤄지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나 : 브리스톨 가는 버스 티켓 하나 주세요.

직원 : 음... 가장 빠른 버스가 11시 25분이네요. (지금 7신데..)

나 : 네...? 쏘리...?

직원 : 버스가 다 매진됐어요. 이것밖에 안 남아있어요. 살래요?

나 : 네..

직원 : 이거 사면 환불은 안되고 시간만 바꿀 수 있고 블라블라블라..

나 : 제일 싼 걸로 주세요..

직원 : 달링.. 잘 이해를 못한 거 같은데, (다시 설명해줌ㅠㅠㅠ)


아... 이렇게 도착하자마자 영어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제일 싼걸로 달라니... 내 입을 꿰매고 싶었다. 이렇게 귀가 안 트여서 석사 공부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버스 매표소에서의 대화가 석사 과정의 험난함을 의미하는 복선이 아니길 바랐다.


표를 끊은 시간은 오후 7시 10분 무렵, 지금은 2시간대로 대기 시간이 줄었지만 아까 전엔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4시간이라니, 그것도 버스표를 미리 예약하지 않은 대가다. 일부러 대한항공 직항을 끊어 런던으로 바로 온 메리트는 게으름뱅이 유학생의 판단 착오로 허공에 사라졌다.


생각해보니 이랬다. 우리나라도 금욜마다 서울에서 지역 각지로 가는 버스와 KTX 표가 죄다 매진인데, 런던은 서울보다 더 큰 도시 아닌가. (금욜 저녁 서울발 대구 도착 KTX 예매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여러 번 겪어봤으면서!!!!!)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할 텐데 백수로 석 달을 살다 보니 금요일의 특성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서러운 순간이 또 있었다. 32kg 무게의 이민 가방은 내가 잘못 잡는 바람에 허리 부분 손잡이가.... 떨어졌고, 그 이민 가방에는 햇반과 쇠고기 통조림이 있지만 지금 이곳에서 먹을 수 없고, 공항 안에 코스타 커피집이 있지만 커피를 마시면 이 어마어마한 짐들을 모르는 사람에게 "제 짐 좀 봐주실래요...?"라고 부탁하고 또 화장실을 가야 하고, 장거리 비행으로 머리는 가렵고, 얼굴은 거울을 보기 싫을 정도로 꼬질꼬질 거지 같고, 나에게 지금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어서 버스를 타고 기숙사에 가서 전기장판을 깔고 푹 자는 것이다. 아... 아직도 2시간 25분이나 남았다.




# "중국인 숫자가 내 예측을 뛰어넘었어"


16일 새벽, 우여곡절 끝에 기숙사에 도착했다. 브리스톨 버스 터미널에서 기숙사까지 태워준 택시 기사는 30년 넘게 살면서 만난 전 세계의 택시 기사 중에서 가장 불친절했고, 심지어 나에게 "거기가 어디야? 길을 설명해봐"라고 하며 대충 내려주고 가버리려고 했다. 한국 같았으면 한국말로 강하게 항의했겠지만 여기서 나는 영어가 서툰 외국인일 뿐이었다. 나쁜 놈... 두고두고 원망할 테다!!!


내가 사는 기숙사에는 중국인 친구들이 많다. 이 사실은 기숙사 등록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학교 기숙사 홈페이지에 "대학원생 기숙사의 80%가 중국인이어서 각층에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을 섞는데 한계가 있다"는 양해 문구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플랫 메이트 3명도 모두 중국인, 엘리베이터를 타도 중국인 친구들이었다. 내가 중국인처럼 생겼는지, 아니면 브리스톨에 중국인이 너무 많아서 동양인만 보면 중국인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기숙사 중국인 친구들은 나를 볼 때마다 중국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이로써 "I can't speak Chinese"는 내가 브리스톨에 도착한 뒤 가장 자주 쓰는 영어 문장이 됐다.


그들은 주로 무리 지어 움직였다. 나는 중국 친구들이 점령한 기숙사에서 외딴섬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기숙사에 나 말고 한국인 학생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이었다!!!!! (기숙사 리셉션 직원을 취재한 결과, 우리 기숙사에는 총 4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명을 더 찾아야 한다.) H와 나는 금세 친해졌고, "사회에서 만난 게 아니니 말을 빨리 트자"고 서로 동의해 반말하는 언니 동생 사이가 됐다. 맛고을 호남 출신인 H는 엄마표 멸치볶음과 누룽지를 영국에 가져왔고, 불쌍한 한국인 언니에게 넉넉한 인심을 베풀었다.


H와 나, 우리보다 더 불쌍한 애가 있었다. H의 플랫 메이트인 홍콩 친구 J였다. H 부엌에 갔다가 우연히 J를 만났는데 그녀는 "우리 기숙사에 사는 홍콩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아.."라고 쓸쓸하게 말했다. "중국인 숫자가 내 예측을 뛰어넘었어"라는 말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J였다. 그리고 브리스톨을 촘촘하게 연결한 중국인 네트워크에 대해 알려줬다.


J : 데이빗(중국인 친구의 영어 이름으로 추정)이 그러는데 중국 친구들이 모여 있는 wechat 그룹이 있대.

나 : 아 그래? 몇 명이나 모여 있는데?

J : 데이빗이 첨엔 50명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이러더라. '앗.. 0을 하나 빼먹었어.' 500명이야.

나 : 헐 500명?????

J : 근데.... 중국 학생 그룹 채팅이 그거 하나가 아니래. He said, we have more groups.


500명이 모인 그룹이 더 있다니.. 우린 그 이야기를 듣고 웃으면서 한동안 패닉에 빠졌다. 그리고 한국인 2명, 홍콩인 1명, 3명의 마이너리티들은 우리끼리 연합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쇼핑도 같이 하고, 학교 모임도 같이 가고, 우리끼리 뭉쳐서 잘 지내보자는 뜻이었다. 그리고 J가 말했다.


"너네 나 버리면 안 돼."


오리엔테이션 들으러 학교 가는 길. 건물 찾느라 식겁한 이야기는 비밀.
기숙사 앞 풍경. 오자마자 짐 푸느라 브리스톨 감상할 시간이 없었다ㅠㅠ
인테리어에 집착하는 자취생은 스팸과 햇반 갯수를 줄이는 대신 각종 소품을 잔뜩 챙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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