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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Sep 27. 2017

대륙의 파워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어학연수로 올걸 그랬어."


석사 친구들끼리 농담 삼아서 한 말이다. 본격 수업이 시작하기도 전 우리는 진이 빠졌다. 수업 소개, 도서관 이용법, 등 우리나라 대학의 오리엔테이션 개념인 Induction을 들었을 뿐인데, 빡빡한 1년 석사 스케줄을 파악한 뒤 국제 학생들 사이에서 묘한 동질감이 형성됐다. 고작 일주일이지만 우리 학과에도 무리가 형성됐다. 중국인 친구들은 언제나 그렇듯 그들끼리 무리 지어 다녔고, 영국인 학생들은 그들끼리, 나머지 민족들은 남미,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등 이웃나라 친구들을 찾아가는 분위기였다.


90명 정원인 학과에서 한국인은 나를 포함해 단 2명. 당연히 친해졌다. 일본인도 2명. 그냥 정이 갔다ㅠㅠ 두 국가는 나름 동북아시아 경제 대국이지만 30~35%를 차지하는 중국인 사이에서 '소수 민족'일뿐이었다. 나와 한국인 P, 일본인 M은 자연스레 친구가 됐고, 한일 연합을 구성했다.


영어 단어를 찾느라 시간이 다 가버렸다.... 모르는 단어가 너무너무 많다.


# 석사 과정을 점령한 대륙 사람들


어림잡아 중국인 학생 비율이 30%라니. 강의실 중간에 자리 잡은 중국 친구들을 보며 너무 많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학과 상황을 듣고 감사하게 됐다. 우리 학과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다른 학과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회계와 금융 전공은 90%, 엔지니어링은 99%가 중국인 학생으로 구성돼 있다고 했다. 소위 취업 잘되는 학과다. 사회학과 철학, 정치학처럼 개념적이고, 졸업 뒤에도 진로가 모호한 학과는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학과가 아닌 듯했다. 중국판 카톡인 '위챗'에 초대받은 한 한국 학생은 "처음 초대받았을 때 'welcome!!!' 몇 마디 하더니 나중엔 중국어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더라"며 위챗 채팅방을 보여줬다. 정말.. 중국어밖에 없었다. 중국 학생 사이에 껴서 석사 공부를 해야 하는 마이너리티들의 푸념이었다.


반대로 중국인 친구들의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엔지니어링 석사 학생의 99%가 중국인이라고 알려준 친구는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중국 친구 X였다. '중알못'인 나도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공대를 졸업한 친구였다. 똘망똘망, 활달한 성격의 X는 "한국인이야??"라며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녀의 고민을 털어놨다. X의 고민은 '많아도 너무 많은 자국민'이었다.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러 영국까지 공부하러 왔는데 주변에 들리는 것은 중국어밖에 없으니 여기가 중국인지 영국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긴.. 내가 영국에 큰돈 써서 공부하러 왔는데 한국 사람 밖에 없으면 겁나 좌절했겠지... 나한테 말을 건 이유도 또래 중국 친구 외에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인 것 같았다.

 

학교 가는 길에 보이는 그래피티. 강렬하다.



# 마이너리티들의 좌절


여러 학과의 중국인 학생 통계를 파악한 뒤 우리 과의 비중국인들은 오히려 안도했다. 학과 프로그램 디렉터 교수님이 "우리 과의 장점은 다양성입니다!! 이런 학과가 없어요"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우리는 인덕션 마지막 시간에 1시간 30분 동안 자기소개를 했다. 기억나는 대로 국적을 나열해보겠다. 절대다수를 차지한 국적은 중국, 그다음은 영국, 그리고 포르투갈, 도미니카 공화국, 자메이카, 한국, 일본, 내 옆에 카자흐스탄 아저씨,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스탄 시리즈는 묶어서), 멕시코, 시에라리온, 튀니지, 불가리아, 홍콩, 인도네시아 등등 몇몇 나라는 처음 들어봐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루마니아, 미얀마, 이집트, 바레인 출신 친구들도 있었다!!) 


공공정책이라는 학과 특성 때문인지 세계 각국의 우수 인재들이 몰려온 듯했다. 내 주변을 둘러싼 이들은 대부분 영국 외무성 또는 자기 나라에서 정부 장학금을 받고 온 이들이었다. 영어가 서툰 카자흐스탄 아저씨도 자국 정부 장학생으로 국세청 근무 경력 15년을 자랑했고, 한 중국인은 '페킹대' 출신, (페킹대가 북경대라는 것을 알고 좌절했다), 정부 부처 자문 변호사, 영국 외무성 장학금 수혜자인 시에라리온 학생은 자기소개 때 "반부패 척결과 반빈곤 정책이 나의 관심사"라며 뜨거운 애국심을 내비쳤고, 나는 그에게서 미래 지도자가 될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리고 M에게 말했다.


나 : 주변에 다들 대단한 사람밖에 없어. 저 일본인 아저씨 있지? 저분은 교육과학기술부 공무원이래. 어떤 영국 학생은 지난 총선에 출마했었대. 너는 일본에서 무슨 일 했어?

M : 아... 나는.... 미니스트리 오브 저스티스 소속이야..

나 : 미니스트리 오브 저스티스...? 법무부???? 그 법무부?? 아 뭐야, 너도 너네 나라 인재구나!!


일본인 특유의 예의와 겸손함으로 무장한 M도 알고 보니 정부 장학금 수혜자인 일본 법무부 소속 공무원이었다. 나만 내 돈 내고 공부하러 온 철없는 유학생 같아서 한동안 우울해 있자 예의 바른 M이 위로해줬다.


나와 P, M은 "마이너리티끼리 뭉쳐야 한다"며 우리끼리 리딩 리스트를 찾기로 했다. 1학기 필수 전공과목은 총 3과목으로 각 과목마다 읽어야 할 '필수 자료'들이 넘쳐났다. 어떤 자료는 E-book이 있었지만 어떤 자료는 도서관을 뒤져 책을 찾아 복사해야 했다. 책 검색 방법, 스캔하는 법, 모든 것이 서툴러 셋 모두 한창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M : 잠깐, 우리 학과 페이스북 페이지에 중국 친구가 자료를 올린 것 같아. 먼저 확인해보고 자료를 찾는 게 어때?

나 : 그래 좋아! 그럼 내가 리딩 리스트를 불러줄 테니까 니가 체크해봐.

M : 응응. 잠깐.... 방금 니가 찾은 책 있지? 그거.. 여기 있는 것 같아..

나 : (책 찾느라 식겁했단 말이야... 스캔까지 떴다) 응..?? 확실해...?

M : 정말 중국인들 대단하다. (차이니즈 아 어메이징.. 담담한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그 책 내용 전체가 PDF 파일로 올라왔어. 우리 자료 그만 찾아도 되겠다..


T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한 중국 친구가 우리 셋이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찾아 헤맨 책과 자료들을 몽땅 페이스북 페이지에 업로드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가 책 전체를 스캔해 올린 PDF 파일의 저자는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님으로 이는 분명 '저작권 보호법'에 위반되는 일이었지만 그는 동료 학생들과 자료를 공유하겠다는 순수한 마음 때문인지 당당히 페이스북에 업로드했다. 우리 학과를 졸업한 중국인 선배들로부터 족보와 자료가 전수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자료가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우리는 자료 검색을 멈췄다. 그리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 : 너네 친한 중국 친구 있어?

M과 P : 아니, 아직..

나 : 나 친해질 것 같은 중국 친구 있어. 본격적으로 친해져 볼게. 그리고 우리 '위챗' 깔자.


나는 그날 밤 위챗을 깔았다. 인증 과정에서 중국어로 숫자를 읽게 만드는 폐쇄적 SNS였지만 플렛 메이트 중국 친구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인증을 완료했다. 대륙은, 위대하다.



약 2주간 학교, 도서관, 집만 무한반복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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