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30대의 유학병>
"너네는 무슨 음식이 가장 먹고 싶어?"
수요일 오후, 펍에서 맥주를 앞에 두고 내가 친구들에게 던진 말이다. 언제나 신중한 일본 친구 M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M : 타코야키 알아? 나는 타코야키가 제일 먹고 싶어.
나 : 타코야키? 그거 위에 오징어 가루가 춤추는 거 아냐? 이렇게~ 이렇게~~
내가 타코야키 위에 뿌려진 오징어 가루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온몸을 비틀며 설명하자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M이 무릎을 쳤다.
M : 아!!! 가쓰오부시!!!
음식이 가열될 때 타코야키, 오코노미야키 위에서 춤추던 오징어 가루의 이름이 가쓰오부시인지 이날 처음 알게 됐다. 오사카 출신인 M은 타코야키가 그립다고 했고, 한국 친구 P는 한국 음식 대신 일본산 와사비가 그립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간장게장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간장게장을 잘 모르는 M을 위해 Marinated Korean crab이라는 영어 단어 조합을 동원했고, 구글 검색으로 간장게장 이미지를 찾았다.
나 : 나는.. 간장게장이 너무너무 먹고 싶어. 요즘 먹고 싶은 한국 음식들이 차례로 꿈에 나오기 시작했어. 후라이드 치킨이 나왔는데 양념은 안 나왔어. 빨리 꿈에 간장게장이 나왔으면 좋겠어. 꿈에서라도 게장 배 열어서 밥 비벼먹고 싶다...
Marinated(저린) Korean crab(한국 게)를 설명할 때마다 한 번에 이해하는 외국인이 드물었다. 한 영국 친구에게 간장게장 제조 과정을 설명해주며 구글 이미지를 보여줬는데도 단번에 알아먹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게 배딱지에 밥알을 넣어 게 내장과 주스(게장 국물)와 함께 먹는다고 설명하자 곰곰이 듣던 친구는 "어메이징하다"며 언제 꼭 한 번 한국에 가서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나는 낯선 땅에서 간장게장을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 간장게장의 추억
나는 내가 간장게장에 이렇게 환장하는 사람인 줄 영국에 온 뒤 알게 됐다. 며칠 전엔 기숙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간장게장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네이버 이미지 검색으로 내장이 가득 찬 간장게장을 구경했고, 레시피까지 알아보다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눈물이 터질 뻔했다. 음식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이토록 컸다.
우리 가족은 간장게장을 좋아한다. 동생의 남편(아직 제부라는 말이 여전히 어색하다)과 내가 처음 식사하는 날에 간장게장 집에 갔고, 과식하지 않는 아빠는 "이 집 게장이 참 맛있네~"라고 칭찬하며 밥 두 공기를 비웠다. 입이 짧은 나도 어린 시절 달짝지근한 간장게장 국물과 마른 김이 있으면 반찬 투정하지 않고 밥을 잘 먹었다.
우리 집의 후천적 간장게장 유전자는 할머니에게서 시작됐다.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은 분이었다. 백종원이 '설탕 전도사' 역할을 하기 전부터 우리 할머니는 김밥 계란 지단에 설탕을 넣어 달달한 김밥을 만든 분이었고, 간장게장도 기가 막힌 솜씨로 만들어냈다. 할머니는 매년 특정 시기가 되면 간장게장을 제조했다. 할머니가 장독대에서 간장을 꺼내고, 5일장에 게를 사러 가시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어릴 땐 살아있는 게가 간장을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모습이 가엽고, 징그럽고, 안쓰러웠지만 그놈 배에 밥알을 넣어 비벼먹을 때면 죄책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출국 며칠 전 만난 친구가 "뭐 먹고 싶냐"고 카톡을 보냈을 때 "간장게장!!!"이라고 쏜살같이 답장해 친구가 "너는 어떻게 일어나자마자 먹고 싶은 게 생각나냐"며 혀를 찰 정도로 나의 간장게장 사랑은 지독했다.
# 땡큐, 168
내가 브리스톨에서 학교와 도서관 다음으로 자주 가는 곳은 168 마트다. 학교로 가는 오르막 길인 Park Street에 위치한 168 마트는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오리엔탈 마트다. 물론 중국 식재료가 가장 많고, 한국과 일본 등 주요 아시아 국가 제품을 찾을 수 있다. 168의 주인은 한국인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가게는 중국보다 한국 문화를 더 사랑하는 듯했다. 168 바로 앞에는 하이트 광고 모델인 송중기의 전신사진이 있고, 계산대 앞에는 아이유가 웃으며 소주를 팔고, 내가 가게에 갈 때마다 흐르는 BGM은 언제나 한국 대중가요였기 때문이다. (맛있는 맥주가 곳곳에 넘쳐나는 영국에서 맥주 맛이 아닌 송중기를 무기로 내세운 하이트진로의 마케팅을 존경한다)
어떤 날엔 짜파게티가 너무 먹고 싶어 집에 가는 길에 168에 들렸다가 문이 닫혀 좌절한 적도 있었고, 서울에 있을 땐 손도 거의 대지 않던 냉장고 속 김치가 생각나 비비고 김치 한 봉지를 사서 안고 간 적도 있었다. 소주가 땡기는 날도 있었지만 세인스버리 저렴이 샌드위치 3개 가격과 맞먹는 6파운드(현재 환율로 환화 9200원 가량)짜리 소주를 살 여력이 안돼 아이유 얼굴만 구경하고 온 적도 있고, 내 바로 앞에서 소주 두 병을 계산하는 한국인 학부생을 보며 그의 경제적 여유로움을 잠깐, 아주 잠깐 부러워하기도 했다.
사람이든, 장소든, 음식이든 그리움의 대상이 됐을 때 그 소중함을 알 수 있는 것 같다. 아빠가 가끔씩 택배로 보내주셨던 김치를 손도 안 대고 냉장고에서 썩혀버렸던 것이 뒤늦게 후회가 됐다. 서울 집 창고에 처박아뒀던 잡곡 패키지, 마른 멸치와 다시마 세트, 김세트, 귀한 줄 몰랐던 매실청 (네이버 블로그를 보면 한식엔 빠지지 않고 이놈의 매실청이 등장한다!!!), 에린이 직장 동료 엄마가 짜서 줬다는 참기름, 한국 음식과 식재료가 귀한 줄 모르고 천대했던 철없는 나의 자취 생활이 부끄러워졌다. 간장게장이 이렇게 귀한지 모르고 그날 게다리 몇 개를 빨아먹지 않고 남겼는데.... 음식이든, 사람이든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요즘 매일 한국 음식을 만든다. 미역국을 끓이고, 계란말이를 하고, 떡볶이를 만들어 친구들과 함께 먹는다. 얼마 전엔 잡채와 찜닭이 너무 먹고 싶어 168에 가서 'Glass nuddle'(당면)을 찾은 뒤 부엌 서랍에 챙겨뒀다. 이러다가 브리스톨 '한식당 꿈나무'가 되는 건 아닌지 말도 안 되는 상상도 해봤다. 만약 네이버 블로그를 보고 간장게장을 혼자 담근다면 새로운 진로를 생각해봐도 될 것 같다.
<수정 : 가쓰오부시는 오징어 가루가 아니라 가다랑어포라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나는 평생 오징어가루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가쓰오부시=가다랑어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