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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Oct 20. 2017

호구들의 반란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그런 사람이 있다. 만나고 나면 기분이 찝찝한 사람. 우리 과 동기 B가 그런 사람이었다. B는 서아프리카 대륙의 S로 시작하는 국가 출신이다. (울과에 S에서 온 사람이 한 명 밖에 없어서 아무리 한국어라고 해도 공개할 수가 없다ㅠㅠ) B의 특징을 나타내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사교적, 잘 웃음, 이해하기 힘든 발음이지만 영어로 고급 문장을 구사함, 발표 수업에 적극 참여, 리더십이 강함.


아프리카 대륙 출신 학생이 귀하다 보니 B는 어디 가나 눈에 띄었다. 나도 태어나서 S나라 사람을 처음 만나봤기 때문에 신기하기도 했고, 그 나라에서 영국까지 유학 올 정도면 보통 인재는 아니다 싶어 '미래 대통령 친구'나 만들어 볼까 하는 불순한 마음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의 사건을 겪은 뒤 B를 친구 카테고리에 넣으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B는 사람을 부리는데 능했다. B는 학기 시작 한 달이 지나서야 내 이름을 다시 물어보고 기억할 만큼 나와 친분이 없는 사이다. 학과 정원이 70명이 넘다 보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B는 내 이름을 물어본 바로 그날, 찝찝한 부탁을 했다. 건방진 영어로 말이다.


B : 너 지금 집에 갈 거야? (나랑 B는 같은 기숙사에 산다)

나 : 응, 왜? 같이 갈까?

B : 그러자. (손에 든 종이를 나한테 내밀며) 이거 니 가방에 좀 넣어줘.

나 : (진짜 못 알아들음) 뭐? 무슨 소리야?

B : 아니 이거 니 가방에 좀 넣어달라고. 나 가방 안 가져왔어.

나 : 아 어어어. 그래.



B가 내민 것은 A4 용지 몇 장과 그의 메모지 한 장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한국인 친구 P의 표정을 봤는데 그리 밝진 않았다. 기분이 애매한 상황에서 B의 리더십에 휘둘려 내 가방에 종이를 집어넣었다. 나와 B, 일본인 친구 M과 셋이 기숙사로 걸어오면서도 기분은 여전히 찝찝했다. 1)우리는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오늘 처음 내 이름 알았으면서) 2)해가 쨍쨍한 날이어서 종이가 젖을 일도 없고 3)팔에 깁스를 한 것도 아닌데 왜 사지 멀쩡한 건강한 놈이 호주머니에 접어서 넣으면 될 종이를 내 가방에 넣어달라고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이 부츠만 신으면 비가 온다. 고무 장화 아니란 말이다... 양가죽 부츠란 말이다!!


집에 가는 길 나눈 대화도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는 대화를 지배하려고 했고, 내가 말하고 있을 때 종종 끼어들어 자신의 크리스마스 계획을 이야기하는데 집중했다.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했다. 혹시 내가 자격지심에 괜한 사람을 오해한 것은 아닌지, 내 마음이 밴댕이 소갈딱지는 아닌지 자기반성을 했지만 여전히 찝찝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상황을 목격한 P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굳이 내 가방에 자기 종이를 넣어달라고 한 B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고, 겁나 짜증 났다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역시 P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P : 나도 아까 좀 짜증 났어. 무슨 왕도 아니고. 나하고 직접 얽힐 일은 없었지만 B가 M(일본인 친구)한테 종종 무례하게 행동하는 거 많이 봤어.


그렇다. B는 나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기분을 찝찝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우리 착하고 겸손한 M에게 B가 무례한 행동을 종종했다고? 이건 M에게 직접 들어야 하는 일이었다. 저널리즘 전공자로서 간접 취재는 아니될 일! 그다음 날 수업이 끝난 뒤 M을 만나 직접 만나 심층 인터뷰를 했다.


나 : 나 어제 B 때매 사실 기분 좀 상했어. 너도 비슷한 일 있었어? (모르는 척)

M : 응.. 몇 번 있었어....


아니, 몇 번이라니? 나는 한 번이었지만 M은 여러 차례 기분이 찝찝한 일을 당한 것이었다. M의 증언에 따르면, B는 종종 자기가 해야 할 일을 M에게 떠넘겼다. M이 도서관에 간다고 하니 도서관 컴퓨터로 B 아이디로 로그인해 자기 시간표 좀 확인해 달라고 한 일, 토론식 수업인 세미나가 끝난 뒤 세미나 질문을 프린트해달라고 '시킨 일' 등 대기업 CEO가 인사권을 행사해 직접 고용한 비서한테나 시킬 법한 일들을 같은 학과 동기한테 부탁이란 이름으로 명령한 것이었다. 우리가 아프리카 왕을 한 명 모시고 있는 셈이었다.


입체적으로 분석한 결과 B는 '부탁=일상'인 것 같았다. 기숙사 리셉션에는 자신이 방세를 내야 할 전날에 전화나 문자로 미리 알려달라는 부탁도 했다. (내가 옆에서 들었다.) 자기가 아이폰 달력에 적어놓고 알람을 켜놓으면 될 것을 자잘한 부탁을 여기저기 하며 온 동네 사람을 귀찮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 집으로 걸어오며 B는 자기 플렛메이트 한 명은 "부엌 청소는 물론 부엌 서랍 정리를 혼자 다한다. She is amazing"이라며 엄청 칭찬했다. 그때 속으로 '네 놈은 청소 안 하고 뭐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혼자만의 생각으로 묻어뒀다.


또 B는 일부 친척들과 가족이 런던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런던 물가 비싸서 아예 원서를 쓰지도 않았는데...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했을 때 B는 자국에서 편안한 삶을 누렸으며, 주변에 귀찮은 일을 대신해주는 이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컸다.


# 호구들의 반란


우리 집에는 호구의 피가 흘렀다. 아빠는 명절을 앞두고 울 동네 사람들 벌초를 다해주는 취미가 있는 분이고, 내 동생도 나한테는 잘하면서 남한테는 싫은 소리를 죽어라 못하는 성격이다. 그런 우리 가족을 시험에 들게 한 일이 있었으니, 바로 동생의 기숙사 룸메였다. 동생이 학부생이었을 때 만난 룸메는 동생에게 A-Z까지 부탁하는 민폐녀였다.


기숙사 이사하는 첫날, 동생에게 자기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으니 기숙사 짐을 1층에서 X층까지 옮겨달라는 망측한 부탁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돈 없이 택시탄 뒤 동생에게 "돈 갖고 기숙사 앞으로 내려와 달라"는 부탁은 일상, "빨래 돌려 놓고 나왔는데 깜빡했어. 빨래 좀 대신 널어줘"라는 명령, 지금 생각해도 열 받는 이 민폐녀 덕분에 거절 못하는 내 동생은 거절하는 법을 억지로 배울 수 있었다.


B는 이제 왕놀이를 그만둬야 한다. B의 리더십에 휘둘려 시다바리 노릇을 했던 순종적인 나와 M도 반성해야 한다. M과 커피를 마시며 계획을 세웠다. B가 하는 부탁은 대부분 별거 아닌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호구 유전자를 타고난 나와 겸손과 예의를 미덕을 여기는 일본 친구 M은 왕놀이에 놀아날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으로 B의 웃는 얼굴에 속지 않기로 했다. 자기 대신 복사해달라고 하면 우리도 웃으며 "니가 직접 해"라고 말하겠노라고, 가방에 종이를 넣어달라고 하면 "그렇게 무거워 보이지 않는데..."라며 숨은 메시지를 전달하겠노라고, 왕놀이는 너네 나라 돌아가서 하라고!!! 우리는 호구가 아니다 이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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