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홍콩>
지난 몇 년간 이 나라 저 나라, 이 도시, 저 도시 떠돌아다니면서 배운 것은 외로움과 어깨동무하는 법이다. 홍콩에서 겪는 외로움은 또 예전의 것과 색다른 맛이 있다. 곧 배우자가 될 펑씨와 펑씨의 가족들이 새 가족이 돼 내 삶을 든든히 뒷받침해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외로움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나도 과거에 그랬지만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외로움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고, 내 내면을 더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으며, 가끔씩은 외로움 때문에 없던 오기까지 생긴다.
오늘 (9월 26일)로서 박사 과정을 시작한 지 이제 한 달이 조금 지났다. 이달 초에 조금 유치한 일이 있었다. 이번 학기에 듣는 수업 중 3명씩 조를 짜서 발표하는 수업이 있는데, 나만 남겨놓고 11명의 학생이 조를 짜버리는 초딩들 사이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박사 과정에서 생겨나고 말았다. 박사 과정의 다이내믹을 설명하자면 12명 학생들 중 유일하게 나만 외국인, 나머지는 모두 중국 본토에서 온 학생이다 (놀라운 점은 홍콩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 교수님께서 자율적으로 조를 짜라고 했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조를 짜다 보니 외국인인 나만 덩그러니 혼자 남았고, 어떤 조에는 4명씩 들어가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들이 왜 조를 짤 때 나를 배제했는지 알지 못한다. 어쨌든 교수님의 개입으로 4인 1조가 된 조에 있던 친구들이 가위바위보를 해 진 친구가 내가 혼자 있는 조에 합류했고 (그 친구는 나중에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자가 격리하느라 온라인 줌(zoom) 미팅으로 수업에 참여한 다른 중국 친구도 나와 한 조가 됐다.
두 번째는 발표 주제 고르기. 리서치 수업에서 배울 철학적 개념을 조를 짜서 이해한 뒤 발표하는 것이 수업의 주요 방향인데, 우리 조는 눈치 싸움에서 밀리는 바람에 다른 조가 다 선택하고 하나 남은 주제를 주워가게 됐다. 나는 사실 아직도 그들이 왜 조 편성할 때 나를 포함하지 않았는지 알지 못한다. 학기 초였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 외에 잘 알지 못했으며,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기 때문에 나를 딱히 좋아할 이유도, 싫어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같은 조를 하면 대화를 영어로 해야 해서 부담스러웠을까? 어차피 모든 수업은 영어로 이뤄지는데 이 이유 때문일까? 아니면 조 편성을 할 때 중국어로 대화하다 보니 내가 알아듣지 못해서 자연스럽게 배제된 것일까? 다수 속에 있는 소수가 겪는 차별과 배제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발생하는 모양이다. 썩 좋지 않은 기분으로 교실을 나설 때 이름을 알지 못하는 중국 친구 두 명이 내게 다가왔다.
A: 우리 식당에 저녁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
나: 나 집에 가서 저녁 먹어야 해. 다음에 같이 먹자.
정중하게 거절하고 혼자 걸어가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식당으로 올라가던 A가 나를 쳐다보고 "Sorry!!!"라고 외쳤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나서서 사과하는 A가 고마웠다.
그날은 마침 펑씨의 친구들과 영국 친구들이 환장하는 '펍 퀴즈'가 있는 목요일 저녁이었다. 마음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있어서 펍 퀴즈에 갈 기분이 아니었지만 이미 동의한 약속이었기 때문에 무거운 책가방을 매고 구글맵을 따라 펍으로 향했다. 이렇게 마음이 힘든 날은 보통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게 공식이지. 구글맵은 현재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해서 목적지와 다른 방향으로 나를 인도했고, 구름다리를 타고 건너가야 하는지, 구름다리 밑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아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지하철역 근처만 맴돌고 있었다. 내가 길을 찾지 못해 결국 펑씨가 지하철 역으로 데리러 왔고 나는 아무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너무 화가 났다.
구름다리를 건너다가 감정이 폭발했다. 화려한 홍콩의 네온사인과 달리 내 마음은 어두웠고, 내 친구들이 있는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 나와바리는 합정역이었는데, 구글맵도 못 찾는 펍에 가려고 몽콕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인가. 눈물을 펑펑 흘리는 나를 보고 펑씨가 당황해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모습은 학교에서 조 편성에서 왕따를 당하고, 집에 가다가 길을 잃고 우는 초딩과 비슷했다. 그렇게 펑펑 울다가 눈물을 닦고 도착한 펍에서 새로 만난 펑씨의 친구들과 인사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펍 퀴즈에 임했다.
펑씨의 친구들이 중간중간 "오늘 하루 어땠냐"고 해서 조 편성하다가 왕따 당한 경험을 공유했는데, 그중 세 명이 마침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것은 초등학교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며 힘내라고 위로해줘 펍 퀴즈가 끝날 때쯤엔 마음이 거의 다 녹았다. 그리고 펑씨와 친구들의 활약으로 열심히 펍 퀴즈에 임한 덕분에 우리 팀은 그날 2등을 했고, 상품으로 공짜 술을 한 잔씩 얻어 마셨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던 이날의 유일한 성취였다. 내가 맞힌 문제는 고작 딱 한 문제다. 주관식이다.
문제: 아프리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는??
나이지리아!
자카르타에서 만난 케냐 친구 덕분에 알게 된 상식이다. 세상에 모든 경험은 나를 성장하게 한다. 이제 한국인의 근성으로 열심히 공부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