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홍콩
브런치에 글 한자 적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석달이 바쁘게 지나갔다. 석사때는 그래도 학교 생활과 공부에 적응하는 인덕션 기간이 있어서 약 한달은 여유롭게 보낸 기억이 있는데 이 학교가 빡신건지 아니면 세상 모든 박사 과정이 그런 것인지 얄짤없이 공부가 몰아쳤다.
12월 초까지 통계 숙제 1, 통계 시험 1, 티칭 어시스턴트 수업 프리젠테이션 1, 에세이 3개 등 쳐내야 할 마감이 6개나 된다. 게다가 프리젠테이션은 왜 이렇게 많은지… 석달 동안 벌써 세 번이나 프리젠테이선을 했다. 20대 후반 젊은이들과 함께 주말까지 바쳐가며 꾸역꾸역 공부하고 있지만, 30대 후반으로 향해가는 이 언니는 정말이지 체력이 딸린다.
힘든 공부를 같이 하다보니 자연스레 친구가 몇 명 생겼다. 수업 2개가 목요일에 몰려 있는데, 수업이 끝나고 배가 고파서 식당에 같이 가는 친구들이 그나마 홍콩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이 됐다. 학기 초 조편성할 때 왕따(?)당했던 일은 서로가 서로를 잘 몰라서, 영어로 나에게 말을 걸려니 부담되고 부끄러워서 생긴 해프닝 정도로 이해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대신 모래알처럼 흩어진 친구 5명 정도를 모아 목요일마다 신세 한탄을 하며 학생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지난주에는 홍콩 음식에 맥주가 땡기는데 공부만 하는 순수한 박사생들이 알코올을 입에 댈지 확신이 서지 않아 맥주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펑씨가 소개해준 학교 근처 대표 홍콩 음식 맛집으로 인도했다. (친구들이 위챗에 올리는 사진을 보면 알코올은 없고 버블티가 전부..) 배가 고파서 지금 당장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겠다는 친구까지 이끌고 간 홍콩 식당은 영어 메뉴가 없는 찐 로컬 맛집이었다. 친구들도 진정한 광동 음식 맛에 감동했는지 맥주 한 잔하자는 내 제안에 모두가 오케이를 했다. 주문은 한자라도 읽을 수 있는 너네가 해라. 6시간 수업 듣고 먹는 맥주 꿀맛이지?
나는 중국 학생들은 대부분 그들의 나라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줄 알았는데, 깊은 대화를 해보니 이것은 나의 편견이었다. 한국 미디어에 중국 네티즌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기사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웨이보 헤비 유저들이 만들어내는 중국인 일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미디어에 속지 말자!
중국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는 조심스러워 상대가 먼저 꺼내기 전엔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여러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최근 당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이 장기 집권 체제에 들어가면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중국 학생들 사이에서 앞으로 연구 주제가 더 제한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고 한다. 홍콩에서도 정부 신뢰도를 묻는 여론조사가 금지됐다고 하니 본토에서는 그 분위기가 어떨지 추측이 가능하다.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는게 복인지 몰랐다. 그래서 나의 지도 교수님은 한국을 대상으로 내가 하고싶은 연구를 마음껏 하라고 격려해주신다.
보통의 머리와 30대의 체력으로 20대 젊은이들과 공부하는게 쉽지 않지만 반 친구 한 명이 한 이야기가 자꾸 맴돈다. “박사 공부는 경쟁이 아니야. 서로 돕는거야. 도우면서 공부하자.” 내가 통계 문제를 잘 몰라 허덕일 때 조언을 해주며 한 말이다. 앞으로 4년을 함께 공부할 친구들. 조 편성할 때 나 안 끼워줬다고 꽁해있었던 나를 용서해다오. 사람은 여러 번 겪어봐야지 절대 한 번 봐선 알지 못한다. 앞으로 홍콩에서의 박사 생활에 한 줄기 빛이 보인다. 12월 초에 내야하는 에세이 3개는 ‘미래의 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오늘은 나는 나약하고 게으르지만 똥줄이 타면 ‘다음주의 나’ ‘12월 초의 내’가 해내겠지.. 이렇게 정신 승리하며 오늘 일기를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