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들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by 수리영

얼마 전 '연습 에세이' 점수가 공개됐다. 연습 에세이는 진짜 에세이를 제출해 진짜 점수를 받기 전에 자기 약점을 파악하라고 교수님이 제안한 숙제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7년간 글을 써서 월급을 받고 살았기 때문에 근거 모를 글쓰기 자신감이 내 안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영어 에세이는 이 자신감을 다 밟아 부셔버렸다. 이메일로 보내주면 될 것이지, 과사 언니는 점수가 1면에 적힌 에세이 피드백 종이를 직접 한 명씩 나눠줬다. 칭찬이라곤 한 마디도 없는 날 선 피드백을 받고 난 뒤 절망했다. 점수를 보고 우울함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본 포르투갈 친구 R이 말했다.


R : 수리 왜 그래? (얘들은 나를 수리라고 부른다. 수영보다 수리가 부르기 쉽다고 한다) 뭔 일 있어?

나 : 아.. 방금 연습 에세이 점수받았는데 점수가 거지 같아ㅠㅠㅠㅠ

R : 아이고.. 포옹이 필요해? 안아줄까?


절망에 빠진 나를 R이 꼭 안아줬다ㅠㅠ 내 옆에 선 이집트 친구 M도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자신의 피드백이 적힌 종이를 보고 있었다. 나보다 3점이 높은 점수였다... '야.. 넌 외교관이고 나는 그래도 글 써서 밥 벌어먹고 살았는데 우리 점수가 왜 이 모양 이 꼴이야?'라고 말하려다가 우리의 자존심이 바닥에 치달을 것 같아서 참았다. 내 표정을 본 M는 논리적으로 나를 위로했다.


M : 이거 성적에 들어가는 거 아니잖아? 그리고 첫째, 한국 교육과정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영국 교육 시스템이랑 다르고 영어는 니 모국어가 아니잖아. 둘째, 니 글쓰기 약점을 알았으면 됐어. 다음에 똑같은 실수 되풀이 안 하면 되니까.

나 : 오.. 나 위로하는 거야?

M : 아니, 이거 사실인데.

나 : 니 피드백에는 뭐라고 적혀 있어?

M : 난 영어 스펠링에 좀 더 신경 쓰래. 아 짜증 나.

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 영어 잘하잖아ㅋㅋㅋㅋㅋㅋ

M : 아.. 그리고 자꾸 더 분석적으로 쓰라고 그러네. 우리 에세이를 저널에 실을 것도 아니고. 기대치가 너무 높은 거 아냐?


점수 못 받은 친구들끼리 말을 주고받다 보니 상한 마음이 금세 아물었다. 나만 병신이 아니구나..ㅋㅋ '동기 사랑'이라는 말은 한국에서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첨에 보고 감동받은 도서관의 아우라. 공부가 잘될 줄 알았는데 잠이 참 잘온다..
울 과(+타과) 동기들. 참~~~ 잘 만났다!

#동기 사랑, 세계 사랑


나는 대학 시절 과생활을 열심히 했다. (공부가 아니다. 과생활이다!!) 전공은 신문방송학과, 줄여서 신방과. 울과에는 희대의 시트콤인 남자셋 여자셋의 환상에 젖어 진학한 나 같은 친구들이 여럿 있었고 선배 중에는 신방과와 연극영화과가 헷갈려 잘못 진학한 사람도 있었다. 진짜다. 매일 같이 동기들, 과 선후배들이랑 뭉쳐서 (술을 마시며) 놀다 보니 동아리 생활할 기회도,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남은 것은 오빠인지 동생인지 언니인지 가족인지 친척인지, 경계가 애매한 신방과 사람들밖에 없었다. 내 이삿날 집 앞에 와 "아 ㅆㅂ, 니 혼자 사는 거 맞나? 이거 4인 가구 짐인데?"라고 쌍욕을 하면서도 커튼 설치까지 다 해주고, 회사일로 우울할 때 집에 쳐들어가 술주정을 해도 (사진을 찍어 평생 놀려먹긴 하겠지만) 내 주접을 모두 다 받아주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었다.


영국에서도 '신방과 데자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국에 오기 전 "이번엔 동아리를 들어서 동아리 생활을 열심히 해야지!!"라고 굳게 다짐하고 왔건만... 두 달이 지나고 나니 내 주변에는 과 동기들만 가득 남아 있었다. 한국인 2+일본인 1로 구성됐던 한일 연합은 중국과 바레인을 흡수한 뒤 멕시코+우루과이+도미니카 공화국 등 라틴 아메리카와 합병했고, 그 뒤 유럽 대륙으로 진출해 아일랜드와 포르투갈, 벨기에, 루마니아와 연합 전선을 이룬 뒤 아프리카로 넘어가 이집트까지 접수했다. 영국인은 한 명도 없는 10명 안팎의 우리네 그룹은 네 대륙에 걸친 거대한 국제 연합이 돼버렸다.


서로 놀리며 구박하며 노는 것까지 신방인들과 비슷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며칠 전 S(벨기에, 피파 게임에 능한 친구)와 펍에서 나눈 대화.


S : 수영 수영!! 너 혹시 한국에 대구라고 알아??

나 : 야 당연히 알지. 나 거기서 엄청 오래 살았어. 내 도시야!! 네가 어떻게 알아?

S : 너 피파 게임 알지? 나 피파할 때 항상 대구FC로 겜했어ㅋㅋㅋㅋㅋ

나 : (실실 웃고 있는 S를 보니 뭔가 불안) 왜..? 네가 게임 너무 잘해서 젤 못하는 팀 골랐냐?

S : 헉, 어떻게 알았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응 내가 너무 잘해서ㅋㅋㅋㅋㅋ 수준 맞추려면 젤 못하는 팀으로 플레이해야 해ㅋㅋㅋ

나 : FU** YOU.

S : 아 왜ㅋㅋㅋㅋㅋ 그래도 나 덕분에 대구 FC 챔피언 됐는데ㅋㅋㅋㅋ


욕을 해도 기죽지 않는 배꼽 빠지게 웃긴 친구들도 많고 마음이 마더 테레사처럼 넓은 친구도 있다. 그중에서도 나와 마음이 잘 맞는 친구는 멕시코 친구 I다. 나보다 네 살 어린 I는 예전 회사 후배를 생각나게 할 만큼 마음이 따뜻하고 예쁘다. 주말에 내가 혼자 지낼까 봐 걱정되는지 멕시코 소사이어티 모임이 있을 때마다 "수영이도 스페인어 할 수 있어!!"라며 나를 초대했고, 그렇게 나도 모르게 멕시코 소사이티 명예 회원이 돼버렸다. 그리고 얼마 전엔 에세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내가 걱정됐는지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수영! 아깐 도서관이어서 에세이 피드백을 제대로 못해줬어. 그거 너한테 엄청 중요해 보이는데.. 내 피드백이 추가로 필요하면 꼭 말해줘! 오늘 12시에 세미나가 끝나면 아무 일정이 없으니까 언제든지 연락해!"


나머지반(?) 소속 친구를 챙기는 I의 마음이 느껴지는 문자였다. 처음 영국에 와서 몇 차례 인간관계에 상처받은 적이 있었다. 내가 마음의 문을 여는 만큼 상대가 열지 않아서, 나를 이용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상했고, 나도 마음의 문을 확 닫아 버렸다. 하지만 자기 공부하기도 바쁜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주변 낙오자( 바로 나다...)를 챙기고 위로해주는 동기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더 이상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주 도서관 스터디룸에서 포르투갈 친구 R이 한 말이 기억이 났다.


R : 야, 너네는 영국에 왜 왔어?

I : 공부하러 왔지!

R : 아니야, 난 너네 때매 온 거야. 이런 친구들 살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줄 알아?

나 : 그래서 나 전 재산 다 털어서 공부하러 왔잖아ㅋㅋ


결국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었나 보다. 이제 영국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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