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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Aug 07. 2017

엄마

<백수 단상>


백수 생활 2개월차. 가진 것은 시간 밖에 없는 30대 백수 친구는 두 아이를 둔 직장맘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다. 특히 오전 7시 출근해야 해 친정 엄마와 바통 터치를 해야하는 내친구 S에게 월요일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백수는 꽤 유용했다.  여섯 살 딸, 네 살 아들, 두 아이의 엄마인 베프 S와 그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 (S의 남편은 제외했다. 오빠 죄송해요...) 일요일 저녁 그집에서 하루 묵어가기로 했다.


베프 S : 야, 근데 내일 아침 7시에 일어나야 한데이.

나 : 왜...?

베프 S : 출근해야지. 아침에 엄마 오신대. 니 우리 엄마 오면 안 뻘쭘하겠나.


이제서야 고백하지만 뻘쭘함보다 더 두려운 것은 오전 7시 기상 시간이었다. 아니, 오전 7시에 집 밖을 나가려면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거냐고ㅠㅠㅠ 백수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기상 시간은 8시에서 9시, 그리고 10시로 차츰 밀려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친구의 육아 부담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나 : 야, 아침에 내가 애들 보면 안돼? 나 시간 많잖아.

베프 S : (니가 할 수 있겠냐는 눈빛으로) 할 수 있겠나 ㅋㅋㅋㅋㅋㅋㅋ  

나 : 엄마한테 천천히 오라고 말씀드려.


그렇게, 나의 첫 이모 육아는 시작됐다.

첫째 H(6`여)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색칠공부를 하는 예술가의 영혼이 불타오르는 딸이었고, J(4`남)는 티라노사우르스가 빙의해 잘 때도 공룡 피규어를 안고 자는 공룡 마니아다. (나는 그날 밤 J 옆에서 자다가 티라노 꼬리에 눈이 찔릴뻔 했다.) J는 아침잠에 취한 나를 흔들며 "이모, 엄마 없어. 엄마 어딨어???"라고 물었고 나는 "엄마 없어? 화장실에 있나봐"라며 답했다.


J : 이모, 엄마 없어....

나 : 엄마 없어??? 아 맞다. 엄마 회사 갔어.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30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육아가 1시간 30분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구나ㅠㅠㅠ 철없는 이모는 쿨쿨 잠만 쳐잤구나 미안해 애들아ㅠㅠㅠㅠㅠㅠ 폰에는 친구가 보낸 카톡이 와 있었다.

'카레 있으니 먹고 싶으면 먹고, 애들이랑 놀이터 갈꺼면 식탁 위에 카드 나뒀으니 초코우유랑 빵 사줘. 니도 먹고 싶으면 사먹고ㅋㅋ 수고해라잉' 내칭구는 불쌍한 백수 친구의 간식 빵까지 챙겨줄 정도로 섬세한 직장맘이었다. 사랑해..힝..

공룡 마니아 친구 아들이 그린 작품.

첫 번째 미션은 아침밥 먹이기. 카레를 데워 애들 밥그릇으로 추정되는 키티 그릇에 곱게 담았다. 유아용 숟가락을 밥그릇에 하나씩 꽂아 잠이 덜 깬 두 아이를 식탁에 앉히는 것으로 우리의 아침 식사 시간이 시작됐다.


H : 이모, 이거 XX이 숟가락인데요?

나 : (순간 당황..) 음.. 그냥 그걸로 먹으면 안될까? 이것도 작은 숟가락이잖아.


방금 일어난 이모는 숟가락 임자까지 찾아줄 여유가 없단 말이야ㅠㅠ 착한 H는 초보 이모의 당황스러움을 감지했는지 동생 숟가락으로 순순히 카레를 떠먹기 시작했다. 나는 "카레 먹고 놀이터 가서 놀면 외할미(애들은 외할머니를 외할미라고 불렀다) 오신다고 했으니까 이거 먹고 놀이터 가자~~~"고 아이들을 유인했다. 누나 옆에 앉은 J는 어젯밤 내 눈을 찌를 뻔한 티라노 친구들을 식탁에 올린 뒤 카레를 먹는둥 마는둥 하더니 나한테 질문했다.


J : 이모, 이모의 엄마는 어디에 있어요?


티라노에게 카레를 먹이던 시늉을 하던 J의 질문에 또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나 : 음, 이모 엄마는 천국에 있어.


그러자 똑똑한 H가 질문을 이어받았다.


H : 왜 천국에 있어요? 그러면 이모는 아기 때 누구랑 살았어요?


아침부터 아이들의 직접적인 질문에 무방비로 노출되자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와 함께한 기억이 멈춘 것은 나와 내동생이 J와 H 남매의 나이였을 때였다. 주책맞은 이모가 될 수 없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나는 어른이니까.


나 : 이모는 어릴 때 아빠랑 동생이랑 친할미랑 같이 살았어. 괜찮아. 나중에 천국가면 다시 엄마 볼 수 있어. 근데 카레 안 먹으면 우리 놀이터 못가요... 카레 안 먹을꺼야??


그러자 아이들의 관심은 이모의 엄마가 아니라 카레와 놀이터에 집중됐다.



엄마의 일기장.


# 엄마의 기억


그날 아침 여섯 살, 네 살짜리 친구의 두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오랜만에 다시 엄마를 떠올렸다. 사실 나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엄마 병원에 들렸다가 이제 혼자 머리를 감을 수 있어야 한다며 엄마한테 머리 감는 법을 배우며 혼났던 기억, 한 살 많은 언니들과 한 해 일찍 유치원 졸업식을 해 어리둥절했던 기억, 엄마 무릎에 앉아 사탕을 먹었던 기억, 네 식구가 함께 여행했던 기억 등 기쁘고, 슬프고, 그때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던 기억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 그 기억들을 다 주워모으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엄마가 떠날 때 여섯 살이었던 내가 이런데 당시 네 살이었던 동생에겐 엄마의 기억이 더 흐릿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엄마의 방식으로 끝까지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남들보다 독립적으로 자라야 하는 여섯 살짜리 딸에게 혼자 머리 감는 법을 가르쳤고, 큰 딸이 유치원을 졸업하는 해에 함께 있지 못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조금 이른 유치원 졸업식을 치르게 한지도 모른다. 네 식구가 부지런히 전국 방방곡곡 여행을 다니며 단시간에 압축된 여행을 한 이유도 나이가 든 뒤에 깨달았다.


올해 초 고향집에 갔다가 엄마 일기장을 찾았다. 1985년 2월부터 그해 5월까지 엄마의 감정과 일상을 기록한 글이었다. 86년생인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 일기장이다. 스스로를 '숙이'라고 칭하는 엄마의 감수성 때문에 손발이 오그라들긴 했지만ㅋㅋ 일기장에는 타지에 일하러 간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엄마 속도 모르고 밤늦게 친구들 술상을 차리라고 하는 간 큰 아빠를 향한 섭섭함, 외로움이 뒤섞여 있었다. 어쩌면, 나는 엄마를 닮아 글쓰는 일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땐 세상을 일찍 떠난 엄마가 미웠던 적도 있었다. 할머니가 싸주는 도시락 대신 엄마가 싸준 도시락이 먹고 싶어 투정을 부린 적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부재 때문에 나는 좀 더 일찍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법을 터득했다.


"이모의 엄마는 어디에 있어요?"라는 친구 아들의 천진난만한 질문 덕분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엄마를 기억 속에서 다시 끄집어 냈다. 나이가 들고, 서른이 되고, 진짜 어른이 되면 엄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줄 알았는데 엄마 생각만 하면 한없이 약해진다. 엄마가 보고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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