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영국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by 수리영

내 운은 거기까지였다. 런던에서 마지막 날 지갑과 다이어리를 함께 털리면서 암스테르담에서 올해 초 운을 다 써버린 것 같다는 입방정은 사실이 됐다. 지갑을 잃어버린 것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올해 초부터 다양한 감정의 기록을 차곡차곡 모아둔 다이어리를 도둑맞은 것이었다. 자기한테 쓸모도 없는 다이어리까지 훔쳐간 도둑놈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눈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나같은 비유럽권 외국인은 영국에서 장기 체류하려면 BRP 카드가 필요하다. 이것이 뭐냐면.. 한 마디로 나의 합법적 거주를 증명해주는 비자다. 술 사러 갈 때마다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는 깐깐한 영국인들 때문에 지갑에 BRP 카드를 넣고 다녔는데 소매치기당하면서 이것까지 분실한 것이었다. 소매치기 사건 때문에 경제적, 심리적 타격이 컸다. BRP 카드가 없으면 영국을 벗어나는 해외여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2월 말 덴마크에 사는 친구를 보러 가려고 끊어둔 비행기표를 비행기 값과 맞먹는 돈을 주고 한참 뒤로 미뤘다. 거기에 비자 재발급 비용을 내고 나니 몇 백 파운드가 훌쩍 나가고 말았다. 친구한테 "나.. 이번 달에 덴마크 못 가. 비자 잃어버렸어.."라고 말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이렇게 내 인생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지, 그냥 꼬여버린 모든 상황이 싫고 미웠다.


비자를 재신청하며 영국 Home Office (내무성)을 격하게 미워하기 시작했다. 사실 원래도 미웠다. 이 느려 터진 놈들!! 한국에서 학생 비자 신청할 땐 3주 만에 비자를 내주던 놈들이, 비자 분실로 재신청을 하니 공짜로 해주지도 않으면서 최소 두 달이나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럼 두 달 동안 영국에 붙어 있으란 말이야? 학교 비자상담센터에 가서 하소연을 하자 그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27페이지에 달하는 비자 재신청서, 경찰 분실 신고, Postal order 구매 (우편환 같은 것), 비자 증명사진 등 이틀간 공부를 포기하고 비자 재신청 서류 준비에 매달렸다. 뭐 하나라도 실수할까 싶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차라리 여권을 잃어버릴걸.. 우리나라 정부는 내 편이잖아ㅜㅜ 속이 또 상했다.


학교 비자 담당자는 규격에 맞춰 가져간 비자 증명사진을 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담당자 : 너... 이거 영국에서 찍은 거 맞아..?

나 : 아니, 한국에서 찍었는데. 규격 딱 맞아! 자로 다 재어봤어.

담당자 : 응 규격은 맞는데, 배경 색깔이 약간 달라. 이건 완전 하얗잖아. 약간 크림색이어야 하거든.


크림색..?? 뭔 아이스크림 같은 소리하고 있나 싶었다. 담당자는 옆에 앉은 직원과 "이거 괜찮겠어?"라고 상의한 뒤 나에게 다시 비자 사진을 찍어오라고 권했다. 그녀는 혹시 내무성에서 사진이 규정에 맞지 않다고 되돌려 보내면 비자 발급 기간이 더 길어질 수 있다고 염려했다. 그렇게 학생회관으로 뛰어가 6파운드를 주고 '크림톤' 배경으로 비자 사진을 다시 찍었고, 이틀 만에 비자 재신청 서류를 내무성에 보냈다.


# 소외감


사실 지난주 런던에 갔던 것은 한국에서 알고 지냈던 미국 친구 J 때문이었다. 티격태격하며 지내긴 했지만 그래도 친구가 온다니 반가웠고, 없는 시간과 돈을 쪼개 비싼 동네 런던으로 갔다. J의 친한 런던 친구 C가 집에 방이 빈다고 해 나도 그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이번 여행은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내가 여기에 섞일 수 있을까?'하고 진지하게 고민한 날이기도 하다.


금요일 저녁이었다. J 친구집에서 공짜로 신세 지는 게 미안해 나와 J는 친구를 위해 한국 음식을 요리하기로 했다. 신이 난 C는 친한 친구들을 초대하겠다고 했고, 우리는 어쩌다 보니 한국 요리 8인분을 1시간 만에 준비하게 됐다. 나는 잡채와 김치전을 맡았고, J는 찜닭을 담당해 마감에 쫓겨 기사를 마감하듯 요리를 아슬아슬하게 끝냈다.


내가 만든 요린데 밥자리는 그리 편하지 않았다. 영국 사람 넷과 호주인 하나 사이에 껴서 잡채와 찜닭을 먹는데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국 사람들은 영국 TV 프로그램과 리얼리티쇼, 거기 출연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내 귀는 점점 더 갈 곳을 잃었다. 앞에 앉아 있던 호주인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지 "너 혹시 이 사람 알아...?"라며 구글 검색으로 사진을 보여줬다. 그래도 걔가 차라리 고마웠다. 대화에서 소외되는 내 모습을 보고 가여워하는 듯했다.


비슷한 일은 다음날 C의 친구 생일 파티에서도 생겼다. (C의 친구.. 한 마디로 남이다!!!) 영국인들은 "하이, 내 이름은 XX야" 인사 한 번 하더니 다들 자기 친구들과의 대화에 빠져 구석에 쭈그러져 있는 아시아 여성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느낀 그 묘한 기분은 무시였다. 친한 친구가 한 말이 기억 났다.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었다. 차별이란 대놓고 눈 앞에 드러나는게 아니다, 뭔지 모르게 더러운 그 묘한 기분, 그런게 진짜 차별이라고. 게다가 내 옆에서 밥 먹고 있던 J는 자기 때문에 이 어색한 파티에 따라온 나를 버리고 '귀여운 영국 여자'와 대화를 하러 사라져 버렸다. 나는 도대체 여기서 생돈을 쓰며 뭐 하고 있는가.. 갑자기 화가 나서 C에게 다가가 웃으며 "나 미안한데 지금 가야겠어. 다음에 꼭 만나자"라고 인사하고 서둘러 나왔다. J도 대화를 끊고 나를 따라 나섰고, "최근에 갔던 파티 중 가장 어색했던 파티야!!"라며 괜한 분풀이를 J한테 하고 나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 여기는 영국이다


영국에 온 지 넉 달이 다 돼가지만 진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영국 친구는 한 명도 사귀지 못했다. 그나마 친한 친구가 한국어 과외를 가르치는 영국 학생이다!!! (내 학생은 한국에 오래 살았고, 아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학과에서도 영국 친구들은 자기네들끼리 어울리거나 혼자 다녔고 (주로 혼자 다니는 것 같다. 그들은 무리 지어 다니지 않는다), 나 같은 외국인 친구들은 맘 맞는 비영국인 유학생들끼리 그룹을 형성했다. 넉 달간 이곳에서 지내면서 한국에 큰 관심을 보이는 영국인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 K-POP, 북한 정도가 전부일뿐, 김치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도 여러 명 만났다. 김치를 모르다니... 그것은 꽤 큰 충격이었다.


한 번은 수업 시간에 영국 교수님이 South Korea를 developing country 카테고리에 넣어 설명하길래 수업이 끝난 뒤 세미나 담당 교수님께 항의한 적도 있다. 애국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GDP와 경제 개발 수준을 감안할 때 개발도상국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다른 교수님께 조용히 항의했고, 그 교수님은 "그래, 그건 수업을 진행한 교수님이 잘못했어. 학교에 이메일을 보내거나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해도 돼"라며 나를 응원(?)까지 했다. (이렇게 나를 응원해준 교수님은 미국인이다..ㅠㅠ) 어쩌면 그 영국 교수님에겐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든, 개도국이든, 어디에 들어가든 중요하지 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전체 수업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영국에 사는 것과 여행하는 것은 정말 다르다. 이곳에서 살지 않았다면 영국의 속 터지는 행정 처리 속도를 몰랐을 것이고, 내가 영어를 곧 잘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고, 우리나라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지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소수로 산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제대로 느끼고 있다. 내가 한국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은 세계 지도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이 작은 나라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먼 길을 찾아온 '특별한 소수의 외국인'들이었고, 이곳에서 만난 영국인들은 한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거나 그나마 가본 아시아 국가가 태국 정도인, 보통 영국인이다. 영국에 온 지 넉 달, 나를 감싸고 있던 다양한 사고의 틀이 깨지는 기분이다. 영국은 어떤 곳인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런던 White Cube 미술관. 이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생길줄 몰랐다..


내 안에 숨어있는 한식 꿈나무의 혼!!! 김치전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테이트 모던에 갔다가 본 모딜리니 특별전. 영국은 큰 돈 들이지 않고 어디서나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다. 앞으로 외국인 입장에서 본 영국 생활 장단점을 정리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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