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by 수리영

해외여행에서 겪어선 안 되는 일이 몇 가지 있다. 1) 여권 분실 2) 비행기 놓침 (천재지변 제외, 자기 실수로. 그래야 상황이 더 복잡해진다) 3) 휴대전화 분실 (여행 사진 죄다 날아감) 4) 수하물 분실 5) 지갑 분실 (신용카드 다 들어있음) 등이다. 난 이중 2번과 4번, 두 가지를 겪어봤다. 지금이야 스마트폰 모바일 뱅킹에 신용카드까지 있어서 비행기를 놓치면 면 모바일 뱅킹으로 돈을 빌리거나 신용카드 빚으로 비행기표 사서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이폰이 아직 세상에 탄생하지 않았던 10년 전 그지 대학생에겐 정말 멘붕이었다. 가장 타격이 큰 사건은 여행 중 수하물 분실이다. 3년 전 스페인 저가 항공사는 나만 비행기에 태우고 세비야 공항에 내 캐리어에 남겨두는 바람에, 나를 분실 수하물 되찾기 투사로 만들었다.


이런 전적이 있었던 탓에 해외여행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면 나는 불안함에 떨었다. 맨체스터에 사는 G와 브리스톨에 사는 나는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만나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우리는 숙소만 예약하고 온 대책 없는 여행자였지만 운은 우리 편이었다. G가 예약한 호텔은 숙박 예약 사이트에서 처음에 제시한 가격보다 다소 비쌌지만 객실에 커피 머신이 있을 만큼 세심한 서비스를 베푸는 곳이었고, 이틀 뒤 온라인 예약까지 마감된 '안네 프랑크의 집'은 우연히 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티켓 두 개를 겟했다. 예약 필수인 암스테르담 맛집 팬케이크 식당도 예약 없이 무턱대고 갔지만 직원이 "예약 안 하면 자리 없는데.. 잠깐만, 딱 한 테이블이 남았네"라며 운 좋게 자리를 내줬다. 길을 걷다가 막 들어간 펍도 분위기는 물론 음악, 맥주 맛까지 좋았다!!!! 마지막에 찾았던 비건 식당은 맛도 좋은데 사장님까지 잘생기고, 또 잘생겨서 구글 평점 별 다섯 개가 모자랄 정도였다. 구글에서 별을 판다면 10개를 더 사서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구글 리뷰엔 '사장이 친절하고, 또 친절하다'는 글들이 넘쳐났다. 친절은 아마도 '잘생김'의 동의어겠지...)


G : 야, 우리 진짜 운 좋다ㅋㅋㅋㅋㅋㅋ

나 : 나 불안해... 너무 잘 풀리잖아...

G : 말조심해. 그런 말 하면 안 돼...


저 멀리서 요리하는 사장님 도찰.. 미안해요..ㅋㅋㅋ


나는 행복의 절정에 있을 때 이후에 찾아올 불행을 걱정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행복에도 총량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무슨 일이 너무 잘 풀리거나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질 때면 그 행복을 온전히 내 몫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수년 전 (친구와) 스페인 여행을 하며 창밖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어 일기장에 그 감정을 적어뒀는데 몇 달 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내 인생은 내 뜻대로 된 적이 별로 없었다. 겜돌이 편의점 알바생의 고사양 노트북을 잘못 건드려 액정을 깨 먹고 거액의 보상금을 물어줬을 때도,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 기사가 다리 교량에 부딪쳐 사고를 냈을 때도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라고 자책하기보다 "내 인생이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다"라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큰 사고가 났는데 다리에 멍 하나 들었을 뿐 죽지 않고 영국에 와 공부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훗날 내 자식에게 들려줄 인생 무용담을 수집하는 단계일 뿐이라고 위로했다.


대신 '재수 없는 일'을 여러 번 겪으면서 문제에 빠르고, 적절히 대응하는 법을 배워갔다. 스페인 항공사가 내 수하물을 분실해놓고 "I don't know where it is..."라는 태평한 소리를 할 땐 "저기 찾아봐. 여기 찾아봐"라고 방향을 제시했고, 비행기를 놓쳤을 땐 신용카드가 있을 법한 한국 직장인 남성에게 찾아가 읍소해 돈을 빌렸다. 불운한 일은 당시에는 '안 좋은 일'이었지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나를 성장하게 하는 일이 돼 있었다.


불행을 겪어봤기 때문에 소소한 행복에 더 감사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박물관에 줄 서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맛있는 팬케이크를 주문하자마자 먹을 수 있다는 것, 시키는 맥주마다 맛있어서 세 잔을 마실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거대한 행복이었다. 내게 행복이란 상대적인 것이어서 과거 여행지에서 무작정 들어갔던 식당에서 오뚜기 3분 요리보다 못한 딱딱한 스파게티를 맛보지 않았다면 맛있는 음식 + 잘생긴 사장의 조합을 큰 감흥 없이 넘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은 딱, 여기까지였다.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보안 검색 요원은 내 몸을 지나치게 꼼꼼하게 수색해 수치심을 느끼게 했고, 브리스톨 공항에서는 "너 여기서 무슨 돈으로 공부해? 공부하면서 일은 해?"라는 질문을 몇 분간 받으며 입국 허가를 받았다. '너네 나라에서 더 살라고 해도 안 살아!!!'라고 말하려다가 더 오래 살고 싶어서 꾹 참았다. 공항 성추행 건은 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보안 검색요원 관련 불만은 네덜란드 국방부에 접촉해 해결해야 한다'며 친절히 국방부 홈페이지 링크를 알려줬다. 네덜란드 국방부가 이름과 여권번호, 사는 곳 등 온갖 개인 정보를 요구하길래 여행의 마지막 운은 훈남 사장님의 채식 식당에서 다 써버린 것으로 결론내고 잊기로 했다. 대신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길 바라며, 재발 방지 차원에서 잠재적 암스테르담 여행자들에게 내 경험담을 공유하기로 했다. 모든 게 잘 풀리면 인생이 아니지. 그래도 비교적 운수 좋은 여행이었다.


추워서 모자 달린 코트를 사입었다. 이걸로 가난한 유학생의 올해 쇼핑은 끝이 났다.
그 유명하다는 팬케이크집! 천장
막 들어간 펍의 맥주. 맛. 있.다.
팬케이크의 위엄! 게눈 감추듯 먹고 예약자에게 자리를 내줬다.
네이버 검색으로 찾아간 카페. 인스타에 해시태그해서 올렸다가 카페 사장님이랑 인친돼따ㅋㅋ
흔한 암스테르담 풍경.
반고흐 미술관. 이곳은 반드시 가보시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