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30대의 유학병>
난생처음 한국 밖에서 생일을 맞이했다. 예전부터 2월은 항상 친구들의 축하를 받기엔 뭔가 애매한 달이었다. 졸업식, 봄방학 사이에 껴있어 분위기가 뒤숭숭했고, 음력으로 1월 1일인 내 생일은 설 명절 주변에 끼여 미역국을 떡국으로 퉁치는 날도 많았다. (스무 살 생일은 정확히 설날이 내 생일이었다!!!) 2년 전엔 설 바로 전날이 내 생일이었는데 내 생일을 몰랐던 친척들이 친구들이 사준 케이크를 내가 자는 사이에 다 먹어치워서 분통을 터뜨린 기억이 난다. 그날 하루 종일 내 생일임을 까맣게 잊었던 아빠는 다음날 내 얼굴을 볼 때마다 "필요한 거 없냐"라고 물어보셨다. 그렇게 내 생일은 봄방학, 졸업식, 명절 틈바구니에 끼여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묻히기 일쑤였다.
영국에서도 그렇게 생일을 보낼 수 없었다. 당일이 돼서야 내 생일을 알려줄 페이스북에 의지할 수 없어 과 동기들에게 직접 내 생일을 알렸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 생일이야~~~ 같이 놀자~"고 말하는 게 여전히 쑥스럽고 어색했다. 유럽 친구들은 자기 생일 광고를 잘만 하던데 이런 게 문화 차이인지, 서른 넘은 한국인은 생일을 알리는 게 낯 간지러웠다. 친한 친구 몇몇에게 생일을 알리자 그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카디프에 사는 포르투갈 친구 R은 "시간 되면 갈게"라고 말하더니 브리스톨까지 왔다. R은 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감동 먹은 내 얼굴을 보고 "특별하게 느끼지 마. 그냥 온 거야"라고 말하는 츤데레 친구였다. 금요일 저녁 와이프와 아들을 집에 두고 1시간 거리를 운전해 내 생일 파티에 온 친구의 말이었다.
# 화장실 투어
파티는 기숙사 지하 1층 커먼룸에서 진행됐다. 마음 같아선 요리해서 애들 저녁을 다 먹이고 싶었지만, 한 명 두 명 늘어나 스무 명 가량 된 손님의 입을 다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한국인은 손님을 굶기지 않는다! 요리 유전자를 타고난 기숙사 한국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김치전을 준비했고, 언제나 그랬듯 김치전은 친구들 앞에 내놓자마자 빠르게 사라졌다. 베지터리안 친구 두 명을 위해 참치를 뺀 김치전도 따로 준비했다. 그날 김치를 어떻게 만드냐는 질문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모른다. (얘들아, 김치 세계화를 위해 힘쓰는 종갓집과 비비고 덕분에 김치는 중국 마트에서 손쉽게 살 수 있단다..)
공용 공간인 커먼룸에는 화장실이 하나 있다. 그래서 내 방에는 애들이 화장실 쓰러 올라올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을 엉망으로 방치했다. 하지만 파티가 무르익을 때쯤 친구 몇 명이 내게 다가왔다. 커먼룸 화장실 문이 갑자기 잠겼다는 것이다. 아까 몇몇이 들락날락하며 용변 보는 것을 봤는데 갑자기 잠겼다니.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도미니카 공화국 친구 M은 "예전에 저렇게 문이 잠겨서 열었더니 사람이 기절해 있었다"며 가장 극단적인 예를 제시했다. 열쇠로 문 따는 놀이를 종종했던 아일랜드 친구 A에게 "너 문 딸 수 있잖아!!!"라고 격려하며 친구 하나가 머리핀을 건네주자 그는 30분 넘게 문을 따는데 열중했고, 소득은 전혀 없었다.
파티가 시작한 지 3시간이 지나자 화장실 가고 싶다는 이들이 속출했다. 점잖은 일본 친구들도 내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울과에서 젤 점잖은) 린타로 : 수영, 나 할 말이 있어.
나 : 응? 이제 집에 가려고? 와줘서 진짜 너무너무 고마웠어!!
린타로 : 아니.. 나 화장실 가고 싶어..
나 : 아...
처음엔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내 방으로 모셔갔지만, 친구들과 섞여 대화에 몰입하려고 할 때마다 뒤에서 어깨를 흔들며 오줌 누고 싶다고 하는 이들 때문에 '화장실 투어'를 기획해야 했다. 화장실을 가야 하는 사람이 한 명 생기면 주변을 돌아다니며 소변이 마려운 친구들을 모집했고, 5명이 모이면 내 방으로 올라갔다. 멕시코 친구 I는 화장실 투어에 세 번 합류한 우수 고객이 됐다.
나 : 화장실 가고 싶은 사람?
I : 나!! 나도 갈래.
나 : 너 30분 전에도 갔잖아.. 또 갈래?
I : 우리 엄마가 기회가 있을 때 절대 놓치지 말라고 했어. 한 방울을 싸더라도 가라고ㅋㅋㅋㅋ
I는 그렇게 어머니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화장실 투어에 합류했다. 애들 엄마도 아니고, 화장실 투어를 이끄다 보니 맥주를 마실 시간도 없었다. 내 방 열쇠를 그냥 주기도 어려웠다. 문에 열쇠를 터치한 뒤 오른쪽으로 돌려 여는 복잡한 방식이어서 원리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문을 한 번에 열기 어려웠다. 한 번은 화장실 투어에 참여하지 않고 친구들에게 열쇠만 줬더니 20분을 헤매다가 "문 여는 원리를 알려달라"며 나를 찾아왔다. 그렇게, 내 생일은 김치전으로 시작해 화장실 투어로 끝이 났다.
# 일기장
영국에 와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이 있다면 우리 과 친구들이다. 최근 두 달은 여러모로 마음이 어려운 시기였다. 갑작스레 관계가 끝났고, 그 감정을 추스리기도 전에 에세이 세 개를 쫓기듯 제출했고, 지갑과 비자, 일기장을 도난당했으며, 비자를 분실한 덕분에 오래전에 계획했던 덴마크 여행이 자동 취소됐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1030페이지짜리 '범죄학' 책에 커피를 쏟아 원치 않게 도서관 책을 구매하게 됐다. 내 노트북보다 두 배는 무거운 비싼 책이었다. 좋은 일보다 마음이 힘든 일이 많았던 내 삶을 옆에서 지켜본 친구들의 위로는 매 순간 큰 힘이 됐다. 내가 부주의해서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자책하자 "진짜 그게 니 탓이라고 생각해? 니 탓이 아니야! 도둑놈 잘못이지!"라며 힘을 줬고, 비자를 잃어버려서 덴마크에 친구를 보러 갈 수 없다고 속상해할 땐 "니 친구 도망 안 가고 덴마크에 있을 거야. 대신 영국 여행하면 되지!"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덴마크에 같이 가기로 한 화장실 투어 우수 고객 멕시코 친구 I는 "네가 안 가면 나도 안 간다"며 80파운드 항공료 수수료를 내고 여행을 두 달 뒤로 미뤘다. 빈틈 많은 내 인생에 촘촘한 조언과 따뜻한 위로를 해주는 이 친구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영국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bell hooks라는 페미니스트 쓴 작가가 쓴 'All about love'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는 우정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놓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연인이 생기면 우정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이렇게 되면 한창 낭만적인 관계에 빠져 있을 때는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닫게 된다. 연인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중하기 위해 친구관계를 끊어버리면 결국은 연인관계에서 자신이 종속적인 위치로 떨어지게 된다. 나는 가까운 친구들이 사랑에 빠지자마자 친구 관계를 끊어버릴 때 참담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된다. (중략) 나는 참된 연인 관계라면 친구들과의 우정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뢰는 사랑의 핵심이다. 우리는 사귀는 파트너가 자기 친구들과 계속 유대를 갖더라도 연인 관계가 약해지거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 일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30대의 연애와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우정이라는 것을, 새 친구들을 통해 배우고 있다. 커먼룸 화장실 문이 고장 나 화장실 투어로 바빠지기 전, 친구들에게 선물을 받았다. 부엉이 그림이 그려진 일기장이었다. 내가 부엉이 좋아하는 건 또 어찌 알고ㅠㅠ 지난 일은 잊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이겠지. 고마운 녀석들, 전 재산 털어서 영국에 오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