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반년, 인생 정산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by 수리영

누가 나보고 영국이 좋냐고 물어보면 망설이지 않고 "좋다"라고 답한다. 영국에 살아서 좋은 점도 있지만, 노동하지 않고, 돈 벌지 않고, 스트레스 제로 (공부 제외)인 상태에서 살면 어디에서 살아도 좋을 것 같다. 영국이 아니라 이렇게 한국에서 살았어도 아마 행복했을 것이다ㅋㅋ 반년 고작 살아놓고 뭘 알겠나... 아마 1년 꽉 채워 살아도 잘 모를 것이다. 나는 영국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 같은 국제 학생들과 어울리며 지낸다. 좋게 말하면 영국 속에서 비영국 문화를 체험하며 산다..그래도 영국에 살면서 여행할 때 느끼지 못했던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있다. 생리대 살 때, 화장품 살 때, 영화를 볼 때, 일상에서 겪었던 일들을 한국과의 차이를 중심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 영국 중소도시에 사는 외국인 유학생이 본 영국의 장점


1. 낮은 기본 생필품 가격, 넓은 선택의 폭


인간이 기본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수적으로 사야 할 물건들이 대체로 싸다. 특히 생리대 가격이 파격적으로 싸다. 부츠 (우리나라 올리브영 같은 것)에서 세일할 때 사면 90펜스(현재 환율, 1파운드 약 1500원)짜리 생리대 한 팩에 12개가 들어 있다. 한국에서 이 돈이면 CU에서 꼴랑 4개 들어 있는 좋은 느낌 생리대를 살 수 있겠지. 그것도 요즘엔 1700원씩 한다. 이 나라에선 우리나라처럼 저소득층 중학생이 생리대 값이 부담돼서 다 쓴 생리대를 뒤집어쓰는 일이 최소한 생기진 않을 것 같다. 영국 와서 좋은 점은 한국보다 과일 값이 싸다는 거! 사과를 좋아하는 나는 사과 예산을 따로 책정해둘 만큼 사과 값이 부담됐다. 당산역 과일 가게에서 맛있는 사과는 하나에 2천 원이 넘었다. 영국은 사과를 비롯해 과일이 한국보다 1.5배 가까이 싼 것 같다. 빵 값도 싸다! 한국에서 타르트 하나 사 먹으려면 4천 원은 기본이다. 세인스버리 타르트 (서울에 르꼬르동 블레 출신 파티셰가 한 것과 비슷한 맛이거든!) 하나에 1.3파운드다... 너무 조아ㅠㅠ


저가 화장품의 본고장, 대한민국에서 온 나는 우리나라 화장품만 싼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Simple 스킨 토너를 세일 기간에 사면 1파운드, 두 달 충분히 쓰는 바디워시도 1파운드 밖에 안 한다. 1파운드짜리 토너를 써서 피부가 거지가 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노노. 스트레스를 안 받아서 그런지 피부는 영국 와서 훨씬 더 좋아졌다. 틈만 나면 까꿍 하고 올라오던 뾰루지를 구경한 지가 언젠가... 양질의 샴푸 린스도 저렴하다. 한국에선 올리브영에서 파는 트리트먼트 츠바키를 2만 원 가까이 주고 사서 썼는데 (가격 가물가물..) 여기 존 프리다라는 브랜드 트리트먼트를 6파운드 주고 사서 쓴다. 진짜 짱 좋다!


모든 제품이 싼 건 아니다. 유기농 과일, 채소는 당연히 더 비싸고, 1파운드 주고 유명 브랜드 화장품을 살 순 없다.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비싼 거 사면되고, 없으면 싼 거 사면된다. 내가 생각하는 선진국은 소득이 낮아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면에서 영국은 합리적이다.


생리컵인 문컵으로 환승했다. 생리대 안녕~~~


2. 저렴한 통신비


영국에 온 뒤 통신비용이 60% 이상 줄어들었다. 폰 기계값을 내지 않는 탓도 있지만 한 달에 15파운드를 내고 5기가를 톱업해서 쓰는데 항상 데이터가 4기가 가까이 남아 돌아서 더 싼 것으로 바꿀까 생각 중이다. 한국에선 폰요금 많이 나올 땐 11만 원까지 나왔는데... (카톡 커피 선물이 한 때 취미였던 적이 있었다...) 여기선 2만 원을 내고 한 달 마음 편안하게 살고 있다.


3. 기차는 비싸지만 버스는 싸다


영국의 대중교통비는 비싸다. 특히 레일 카드가 없으면 기차가 무척이나 비싸서 아직 타 본 적이 없다. 버스는 싸게 끊으면 브리스톨 런던 왕복 티켓을 10파운드에도 살 수 있다. 부지런하게, 계획적으로 움직이면 교통비를 더 아낄 수 있지만 나는 부지런하지도, 계획적이지도 않아서 그냥 적당히 표값 지불하고 탄다ㅋㅋ


생뚱맞게 도서관 사진 투척...!!!


4. 돈 없어도 문화생활 가능


런던의 주요 미술관과 박물관은 모두 공짜. 브리스톨도 마찬가지다. 난 브리스톨이 좋지만 런던에 사는 이들이 부러운 점 하나는 내셔널 뮤지엄과 테이트 모던, 코톨드 갤러리 등 세계 명작이 걸려 있는 미술관을 시간만 있으면 공짜로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원경 작가님 책을 읽고 알게 된 코톨드 갤러리는 런던에 숨어있는 최고 미술관이다. 모네와 마네, 루소와 윌리엄 터너 작품이 모두 한데 모여 있고, 이 미술관은 유료지만 학생증을 내면 공짜로 볼 수 있다. 미술책에 나오는 작품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며 자란 영국인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브리스톨은 예술의 도시다. 세계적인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고향이고, 동네 곳곳에 그의 작품이 있다. 몇 달 전 암스테르담 갔을 때 고가의 입장권을 사서 뱅크시 특별전을 보러 갔는데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렇다.. 사람들이 몇십 유로씩 내고 보는 전시회를 나는 학교에 갈 때마다 본다. 공연도 많다. 우리 동네 펍에도 시간만 잘 맞춰가면 수준 높은 재즈 공연을 들을 수 있다.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세인트 조지 콘서트홀이 있는데 여기서 Lanterns on the lake의 공연을 첨보고 팬이 됐다.


햐. 누가 뱅크시 작품에 낙서했다ㅠㅠ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뱅크시 작품. 꼭 동네 사람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ㅋㅋㅋ


5. 미세먼지 제로


서울에 살 땐 '미세미세' 앱을 깔아놓고 미세먼지 농도가 높으면 집순이 생활을 했다. 작년 봄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한강에 치맥 하러 가고 싶은데.... 미세미세 앱에 해골이 떠 있으면 계획을 바꿔 창문을 꼭 닫고 집에서 통닭을 뜯었다. 영국 날씨가 우중충해서 그렇지 이곳에서 미세먼지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맑은 날 구름 보고 걸을 때 제일 행복하다. 그래서 밤하늘도 맑다. 별 구경하는 게 이렇게 신나는 일인지 몰랐다ㅋㅋ


미세먼지 제로!



6. 빈티지 샵


브리스톨 곳곳엔 차리티샵, 빈티지샵이 많다. 내가 영국에 와서 가장 잘 산 물건은 초록색 빈티지 구두! ZARA, 유니클로, H&M 등 모두가 비슷한 옷을 입고 다니는 시대라서 그런지 난 같은 가격이라면 잘 관리된 빈티지 제품이 더 좋다.



# 단점


1. 비싼 월세


런던은 더하지만 브리스톨의 렌트도 장난이 아니다. 학생 기숙사지만 한 달에 우리나라 돈으로 100만 원 가까이 주고 산다. 브리스톨 친구들 말론 이 동네 렌트가 최근 몇 년 새 껑충 뛰어올랐단다. 기숙사가 아닌 집을 구하려고 해도 플랫 메이트는 필수다. 중국인 친구들이 부엌을 더럽게 쓸 때면 내 부엌, 내 거실이 한 번씩 그리워진다...


2. 더럽게 느린 행정 처리


말하면 입 아프다. 두 달 전 비자 재신청 서류를 접수했는데 아직도 깜깜무소식이다ㅋㅋㅋ 내무성에 연락해서 빨리 처리해달라고 했더니 "프리미엄 서비스로 돈 더 내면 빨리 해보도록 노력할게"라고 완곡하고 책임감 없게 말했다. 이 신자유주의 신봉자들..... 프랑스 사는 한국 친구한테 말했더니 "야, 나는 작년 11월에 운전면허증 갱신 신청했는데 아직도 안 나왔다..."고 나를 위로했다. 프랑스가 갑이구나..ㅋㅋㅋㅋㅋㅋ


3. 흐린 날씨


항상 책가방에 우산을 넣고 다닌다. 부슬비가 오면 그냥 맞고 다닌다. 오늘은 3월 29일. 코트를 벗고 나갔더니 추웠다. 아마도 봄은 오지 않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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