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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Apr 28. 2018

Indian giver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공부하고, 놀고, 또 에세이 쓰고, 노느라 바빴다. 에세이 마감을 앞두고 두 번이나 다른 나라로 놀러 다녔다. 일주일 다녀온 스위스는 에세이 마감이 2주나 남아 있어서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갔고, 5일 일정의 코펜하겐 여행은 결국 노트북과 함께 했다. 나란 인간... 일을 끝까지 미룬 결과였다.


처음 계획은 여행 직전에 모든 에세이를 제출하는 것이었으나 현실에서 나는 계획보다 느렸고, 더 게을렀다. 멕시코 친구 이사벨, 나, 한국 친구 P, 이렇게 셋이 한 여행에서 내가 피운 게으름의 희생자는 한국 친구 P였다. 같은 과 친구인 이사벨은 에세이를 거의 끝낸 상태에서 최종 마무리 작업을 하려고 노트북을 가져왔지만, 게을러터진 나는 그곳에서 막판에 에세이를 써댔기 때문이다. 여행 첫날 화창한 코펜하겐 하늘은 P 혼자서 만끽했고, 나와 이사벨은 3시간 넘게 카페에 남아 숙제를 했다.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했다. (게으른 네 친구를 맘껏 원망해라.. 미안하다ㅠㅠㅠㅠㅠ)


나는 마감에 맞춰 삶의 속도를 맞추는 보통의 인간이었다. 낮에는 신나게 놀다가 친구들이 잠들면 '새벽 글빨'을 받아 빛의 속도로 에세이 분량을 늘렸고, 결국 여행 마지막 날 마감을 코 앞에 두고 새벽 3시에 에세이 세 편을 제출하는 것으로 게으름의 종지부를 찍었다.


내가 코펜하겐에 온 건 한국에서 만난 친구 알렉스 때문이었다. 우리는 2012년 대구에서 처음 만나 각자 직장을 잡아 서울에서 재회했고, 어쩌다 보니 유럽 이웃사촌으로 살게 됐다. 코펜하겐과 브리스톨이라니. 참 예상치 못했던 장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와 이사벨, P는 올해 2월 알렉스를 찾아갈 예정이었다. 내 인생이 언제 내 뜻대로 된 적이 있었던가. 런던에서 비자 카드가 든 지갑을 소매치기당하는 바람에 결국 2월 여행은 물 건너갔고, 비행기 표를 바꾸지 못한 P만 혼자서 알렉스를 찾아갔다. 그렇게 나 없이 P와 알렉스는 어색한 우정을 쌓았고, 4월엔 세 명이 완전체가 돼 알렉스를 다시 찾아간 것이다.


친구들이 잠에 들면 시작되는 에세이 라이팅.



# Buzzkiller, Indian giver


 이번 여행에서 나는 버즈킬러 (Buzzkiller: 분위기 망치는 인간)였다. 착한 친구들은 "별 문제없었어. 니가 스트레스받았지"라고 위로했지만 사실 난 에세이 때문에 큰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마감에 쫓겨 살았던 나는 마감이 되면 밤을 새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감 시간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물론 밤 12시가 넘어서 노트북을 꺼내 들고 두드리긴 했지만, 이런 나 때문에 평화로운 여행에 돌을 던진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버즈 킬러라고 정의했다.


인디언 기버 (Indian giver: 선물 줬다가 뺏는 사람)는 알렉스가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P가 노르웨이 베르겐으로 날아간 다음날, 우리 셋은 잡채 파티를 했다. 알렉스 집에 누군가 남겨두고 간 당면을 본 뒤 두말할 것 없이 잡채를 그날의 요리로 선정했다. 잡채의 성패는 유일한 한국인인 내 손맛에 달려있었다. 사실 난 한국에서 외식을 많이 했지 집밥을 자주 해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손이 많이 가는 한식보다 파스타나, 스페인식 빈대떡 등 30분 안에 끝낼 수 있는 요리를 해서 내놨다. 하지만 물가 높은 영국 생활 7개월은 내 속에 숨어 있던 '한식 꿈나무'의 재능을 일깨워 줬다. 런던과 브리스톨에서 각각 시도했던 잡채는 외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첫 번째 잡채는 시금치를 너무 오래 데쳐서 흐물흐물했고, 두 번째 잡채는 쇠고기를 너무 많이 넣어 느끼했지만, 그들은 참 맛있게 잡채를 해치웠다. 두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채식 버전과 쇠고기 버전으로 각각 완성시킨 잡채는 멕시코인과 미국인을 감동시켰다. 웬만해선 큰 칭찬 안 하는 알렉스도 "It's really good"이라고 good에 really를 붙였다!


나 : 알렉스, 이거 5점 만점에 몇 점이야?

알렉스 : 너 별점 매기는 거 진짜 좋아하는구나.. 진짜 맛있어.


5점 만점에 5점을 기대했지만 코펜하겐 한식점에도 5점 만점에 3.5점을 준 알렉스에게 주관식 평점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사벨과 나는 브리스톨에서 브리스톨 명물인 서스펜션 브릿지와 열기구가 새겨진 컵받침과 초콜릿 맛이 나는 술인 Baileys, 브리스톨 초콜릿 맛집에서 산 쿠키와 초콜릿을 선물로 사 왔다. 잡채와 샐러드, 화이트 와인을 한 잔씩 하고 나니 달콤한 것이 땡겼다.


나 : 알렉스.. 너네 집에 초콜릿 있는 것 같은데.. 와인맛 초콜릿 먹어봤어? (우리가 사 온 게 와인맛 초콜릿이다)

알렉스 : 너네가 사 온 거? 먹고 싶으면 먹어.


그때 나온 단어가 인디언 기버였다. 알렉스는 선물을 줬다가 뺏는 사람들을 칭하는 미국식 표현이라며 우리에게 친절히 알려줬다. 유럽의 탐험가들이 미대륙에 와서 원주민들에게 선물을 받기만 하고 답례를 하지 않자 원주민들이 선물을 다시 달라고 요구해서 이런 표현이 생겨났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어원은 잘 모르겠다. 암튼 선물로 준 초콜릿을 같이 까먹자고 강하게 요구하는 나는 이날 인디언 기버라는 별명을 새로 얻었다.


잡채와 화이트 와인, 그리고 김치!


# 알렉스의 퇴근 시간


코펜하겐은 모든 게 여유롭고 느긋해 보였다. 서둘러 움직이는 이들은 공격적인 자전거 운전자밖에 없는 것 같았다. 아침 9시쯤 일어나 아침 11시쯤 집을 나서 미술관을 둘러보고, 저녁엔 알렉스를 만나 밥 먹고 맥주 마시고, 수다 떠는 게 전부인 여행이었다. 그렇게 이 도시의 느긋한 속도에 우리를 맞췄다. 알렉스는 오후 4시가 되면 일을 마치고 30분 만에 운전을 해 집에 돌아왔다. 늦게 일어나 늦게 집을 나서니 알렉스가 없이 관광하는 시간은 고작 5시간 남짓 했다. 잡채를 만들어 먹기로 한 날도 장을 봐서 집에 오니 오후 4시 반 밖에 안됐는데 알렉스가 거실 소파에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떡하니 앉아 있었다. 이날 이사벨과 나의 유일한 목표는 알렉스보다 일찍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그것마저 실패했다. 우리가 느린 것이 아니라 이놈의 복지 국가, 조기 퇴근 문화 때문이었다. 야근하면 6시에 마치는 나라가 덴마크다.


이 같은 문화 충격은 일상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챔피언스리그 리버풀 vs 로마 경기가 있었던 날이었다. 알렉스 영국 친구들의 축구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국에서도 안 보는 축구를 보러 펍에 갔다. 성평등 국가인 덴마크에서도 축구는 여전히 남자에게 더 어필하는 스포츠였다. 펍이 꽉 찼는데도 여자는 이사벨과 나를 비롯해 몇 명 없었고,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는 이들은 죄다 남자였다. 그날 알렉스는 펍에서 우연히 직장 동료를 만났다. 한참 대화를 나누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직장 동룐데 얼마 전에 육아휴직 쓰고 복직했거든. 다른 동료랑 일 이야기도 할 겸 축구도 볼 겸 여기 왔나 봐." 북유럽 국가의 성평등 정책과 아빠의 육아 참여는 익히 보고 들어 잘 알고 있었지만 육아휴직 끝내고 복직한 남성 직장 동료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 상황이 나는 낯설고 신기했다.


한국에서 나는 참 바쁘게 살았다. 회사 생활 막판에는 "일만 잘하면 된다"는 부장을 만난 덕분에 퇴근 시간이 조금 빨라지긴 했지만 오후 7시 이후 퇴근이 일상이었다. 혹시라도 오후 6시에 마치는 날에는 뭔가 일을 덜한 것 같아서 찝찝했다. 내가 속했던 언론 산업의 특성도 있었겠지만 야근과 주말 근무를 밥먹듯이 했고, 초과 근무에 대해선 적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그런 직장 문화가 못마땅해도 체념하고 그냥 다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일을 더 많이 시키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도 주변에 널리고 널렸으니까. 얼마 전에 전 직장 동료랑 카톡을 하다가 육아휴직 이야기가 나왔다. 남성 육아 휴직 의무화 기사를 시리즈로 쏟아낸 신문사에 다니면서도 "같은 부서 직원들 눈치가 보며 출산 휴가 3개월만 쓰고 복직해야 할 것 같다"며 가상의 상황을 걱정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나를 씁쓸하게 했다. 뭐가 그렇게 일이 많고 바빠서 회사는 아이가 성장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을 놓치게 만드는 것일까.


한국을 떠나 덜 바쁘게 살면서 느낀 점은 행복이란 게 참 별거 없다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때, 블루투스 스피커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친구한테 선물 받은 커피 드롭으로 커피를 내리며 커피 향을 맡을 때, 맑은 하늘에 있는 구름을 볼 때. 영국이어서, 덴마크여서 이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니라, 소소한 곳에 숨어 있는 행복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일에 치여 바삐 살아온 것뿐이었다. 나는 가만히 나와 내 주변에 집중하고 살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월~금요일, 평일에 찾아온 친구 셋을 알렉스가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도, 밤마다 맥주를 마실 수 있었던 것도, 오후 4시가 되면 퇴근하는 이 나라 문화 영향이 컸을 것이다.


루이지아나 현대미술관은 코펜하겐에 가는 사람이라면 꼭 가봐야 한다! 피카소 세라믹 특별전과 함께 이 어마어마한 풍경을 봤다.


목요일 낮, 코펜하겐 외각에 있는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에 갔다. 알렉스 직장과 차로 10분 거리여서 미술관 관람이 끝날 때쯤 알렉스가 데리러 왔다. 정확히 오후 4시 10분이었다. 미술관 기념품 코너에 디자인 강국 코펜하겐답게 두 손바닥 사이즈의 스타일리시한 코펜하겐 가이드북이 있었다. 우리 말고도 앞으로도 손님을 꾸준히 맞이할 알렉스에게 줄 선물로 이 책을 샀다.


나 : 알렉스,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알렉스 : 음.. 니가 먹고 싶은 음식 샀어?


그렇다. 이제 나는 영원한 인디언 기버가 됐다.


우리가 선물한 술에 적혀 있었던 Indian giver's mind setting. "For you, but really for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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