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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May 20. 2018

영국식 예의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얼마 전 친구 생일 파티에 갔다가 이곳에서 5년째 살고 있는 독일인 K를 만났다. K는 무상 고등 교육을 제공하는 자국의 혜택을 뒤로하고 등록금을 내고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친구다. K는 뒤에 있는 영국인들의 눈치를 잠깐 살핀 뒤 조심스레 말했다. "영국 사람들은 너무 간접적으로 이야기해.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되지, 헷갈리게 말이야. 아직도 난 적응이 안돼."


K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랬다. K의 영국인 직속 상사는 항상 말을 돌려서 해서 K를 종종 무례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그녀의 보스는 K의 의자 뒤에 걸린 가방을 보고 "K, 저쪽에 공간이 많은데, 만약 실례가 안된다면 내가 니 가방을 저쪽에 옮겨놔도 될까?"라고 아주 장황하게 말했단다. K는 상사가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하는지 알고 "아니, 괜찮아. 난 내 가방이 여기 있는 게 편해"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의 상사가 의도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K : 나중에 다른 직장 동료가 나한테 오더니 이러는 거야. "아까 보스가 너한테 그렇게 말한 건 니 가방 때문에 불편하니까 좀 치워달라는 뜻이었어.." 아, 너무 헷갈려. 그럼 그냥, 'K 니 가방이 통행에 불편을 주고 있어. 좀 치워줄래?'라고 말했으면 내가 바로 치웠을 거 아냐, 진짜 답답해!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혹시 나 여기서 담배 피워도 돼? 만약 불편하면 내가 저기 가서 피울게."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봐, 이렇게 서로 확실하게 말하고 답하면 편하잖아!"라고 말한 뒤 의자를 빼 멀리서 담배를 피웠다. 예의 바른 흡연자였다.


보기드문 영국의 맑은 하늘. 블로그 글과 상관 없는 사진ㅋㅋ



# 영국식 예의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여러 차례 했다. 내 경험상 영국 사람들은 "No"라는 말을 좀체 하지 않는 듯했다. 몇 달 전 일이었다. 에세이를 쓰기 전 방향을 잡으려고 '영국인' 교수님을 찾아갔다. 가난과 불평등이 주제인 수업이었다. 교수님은 내 주장을 가만히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음.. 너에겐 표현을 자유가 있어 (freedom of speech). 네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돼. However...."


뭐지.. 내 주장이 괜찮단 말인가, 맘에 안 든단 말인가. 순간 교수님의 피드백을 듣고 너무나 헷갈려 연구실을 나오자마자 친구들한테 물었다.


나 : 교수님이 뭐라고 한 거야? 내 주장 별로니까 바꾸란 말이지?

친구들 : 아마도 그런 것 같아...


결국 교수님이 하고 싶은 말은 'however' 뒤에 있었던 것이었다! 영국인들의 변죽을 울리는 화법은 비영국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런던에서 2년간 살았던 미국인 언니 H는 간접 화법의 대마왕인 영국인들 사이에서 일하며 겪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토로했다. 같은 영어를 구사하는데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고, 언니는 털어놨다. 언니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랬다. 언니의 가방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영국인 친구는 "음.. 넌 네 가방에 아주 관대한가 보구나"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언니는 저것이 말인지, 방귀인지, 영어인지, 알아먹지 못해서 다른 영국인 친구를 쳐다보고 도움을 청했단다. 미국식 영어로 해석하면 "니 가방 열려 있어. 조심해. 런던에 소매치기 많잖아!" 이런 뜻이었다.


영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멕시코 친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박사 과정은 교수님의 피드백을 따라 연구 방향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다. 친구가 교수님에게 과제를 제출할 때마다 교수님은 'Not bad'라는 코멘트를 줬다. 친구가 내게 물었다.


멕시코 친구 : 너 not bad가 뭔 뜻인지 알아?

나 : 나쁘지 않다, 괜찮단 거 아냐?

멕시코 친구 : 아니, 나도 첨엔 그런 줄 알았는데 엄청 별로란 뜻이야. not bad 코멘트를 따라서 연구하면 박사 과정이 망하는 거지ㅋㅋㅋㅋ not bad는 다시 하란 말이야.

나 : 아..


영국 영어는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선 안되고 행간의 의미를 읽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8개월 넘게 산 뒤 깨닫게 됐다.


# 무례한 한국인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한국인은 종종 이런 문화 속에서 의도치 않게 종종 무례한 행동을 했다. 친한 영국 친구에게 내 폰을 넘겨달라고 부탁하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Give me my phone." 플리즈조차 없는 무례한 문장이었다. 나 스스로 문장의 무례함을 느낀 뒤 바로 수정했다. "Sorry, would you mind passing my phone?" 셀프 수정을 거친 친절한 문장이었다. "우와, 수영, 너 진짜 무례했어ㅋㅋㅋ"라면서 친구는 내 폰을 건네면서 한참을 웃었다.


영국 친구 T는 'would you mind' 'parden?'을 입에 달고 사는 예의 바른 청년이다. T는 나이를 물어볼 때도 상대가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우리과에는 나와 동갑인 이집트 친구 M이 있다. M은 외교관이라는 직업 탓인지 아니면 하루가 다르게 빠지는 머리카락 탓인지, 아니면 4050 패션 때문인지 그의 나이를 30대 초반으로 짐작하기 어려웠다. T는 M의 나이가 궁금했는지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T : 실례가 안된다면 혹시 너의 나이를 물어봐도 될까? (아주 긴 영어였다. 그냥 하우 올드 아유? 면 끝나는데 말이다)

M : 음, 맞춰봐. (너 왜 그래, 그냥 말해줘!!!! T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고!!)

나 : M이랑 나랑 동갑이야!!! 근데 그렇게 안 보이지? 내가 더 어려보이지??ㅋㅋㅋㅋㅋㅋㅋ(내가 나서서 중재했다. 정직한 T의 입에서 38, 39라는 숫자가 나오게 둘 수 없었다)

T : 아.. M 너는 직업 특성 때문에 실제 나이보다 조금 더 '성숙'하게 보이면 더 존경받지 않아?


나는 이날 T의 언변과 예의 바름에 감탄하고 말았다. 그 짧은 시간에 M이 상처받지 않도록 직업과 나이, 존경심을 연결시키는 논리를 개발한 것을 보고 영국인의 예의 바름에 혀를 내둘렀다. 이들의 예의와 간접 화법을 배우려면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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