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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Jun 11. 2018

영어 이름이 없는 이유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나는 영어 이름이 없다. 한국 이름인 Suyoung을 그대로 영국에서 쓰고 있고, Suyoung이 어려운 사람들은 Suri 또는 Su라고 부른다. 내가 언제부터 수리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친한 한국 친구들도 나를 수리 또는 수리영이라고 부른다. 수리는 내 별명으로 수영의 변형이지 새로 창조한 이름이 아니다. 브런치 아이디부터 인스타 아이디까지, 죄다 suri0인 이유가 여기 있다. 30년 넘게 황수영, 수리영으로 살았는데 갑자기 로라, 나탈리, 해나가 될 수 없었다. 이름은 내 정체성의 일부다. 새로운 영어 이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썩 내키지가 않았다.


서울에 살 때도 서울말을 쓰지 않았다. 서울에 고작 2년 반 살아놓고 오랫동안 써온 경상도 사투리 (방언)를 갑자기 바꾸는 것도 내 인생철학에 반하는 일이었다. 만약 방송 기자였다면, 서울에서 오래 살았다면 서울말을 썼을지도 모른다. 직업인은 직업인의 옷에 맞게 행동해야 하니 아마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내 사투리에도 경남 사투리와 대구 사투리가 묘하게 섞인 것 보면 서울에 3년 넘게 살았다면 환경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억양이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서울을 거쳐간 신문 기자였다. 내 글이 입을 달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말을 할 때 서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고어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서울에 사는 여자가 사투리를 쓰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게 보는지 "어머, 사투리 쓰세요? 고향이 어디예요?"라고 종종 되물었다. 김제동, 이경규, 강호동 등 남성 방송인들은 경상도 사투리를 대놓고 쓰면서 승승장구하는데, 왜 사투리를 쓰는 여성 방송인은 잘 보지 못한 것일까. 사투리에도 보이지 않는 남녀 차별이 존재하는 듯했다.


몇몇은 "서울말 쓸 수 있어요?"라며 농담도 했다. 그럴 땐 그냥 웃음으로 때웠다. 안될 줄 알았는데 꾸준히 연습하니 특수한 상황에서 표준어는 쓸 수 있게 됐다. 2년 넘게 라디오와 방송 뉴스를 만들면서 억지로 연습했더니 비슷하게 쓸 수 있게 됐다. 외국어도 공부하는 한국인이 같은 나라 말인 서울 표준어를 구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햇빛 찾아 떠난 피크닉. 껍질이 일어날 정도로 벌겋게 탔다.


영국에 와서 조금 놀란 점은 중국 친구 대부분은 자기 이름과 큰 연관이 없는 영어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힐러리, 트레이시, 렉시, 사브리나, 에리카.... 나는 애들이 영어 이름으로 자기소개를 할 때면 중국 이름은 뭐냐고 되물었다. 알고 보니 트레이시는 '화정'이었고, 릴리는 '공채', '프레드'는 홍양, 영어 이름이 기억도 안나는 내 플렛 메이트는 '양민'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들의 잃어버린 중국 이름을 되찾아주었다. 그들이 영어 이름으로 불리고 싶으면 영어 이름을 불러줬지만 저렇게 예쁜 이름을 두고 영어 이름을 쓰는 친구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중국 친구 중 영어 이름이 없는 친구는 '유팅'이었다. 유팅은 "너랑 같은 생각이야. 난 유팅이니까 유팅이지?"라며 영어 이름을 만들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는 종종 남의 기준에, 남의 시선에 나를 맞춘다. 나라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최대한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영국에 와서 좋은 점은 한국에서보다 남의 시선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어서다. 끝이 해져서 잘 입지 않던 옷이나 작은 구멍이 난 양말, 살짝 닳은 신발, 구멍이 난 스타킹, 남들 눈에 보일까 말까 한 그런 작은 흠집이 있던 것들을 나는 웬만하면 착용하지 않고 버렸다. 여기선 내가 편한 것, 내가 좋은 것들을 남들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쓴다. 휴양지에서나 입을법한 브래지어가 다 드러나는 원피스부터, 배꼽티, 레깅스 패션, 한국에선 남들 시선 탓에 옷장에서 잠자던 옷을 여기선 일상처럼 입고 다닌다. 20대가 입는 옷, 30대가 입는 옷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므로, 내가 편한 옷, 내가 입었을 때 자신 있는 옷을 입고 다닌다. 햇빛을 피해서 그늘만 찾아다니던 내가, 주근깨 기미가 생길까 봐 햇빛을 무서워했던 내가, 여기선 햇빛만 뜨면 잔디밭에 가서 친구들과 벌렁 드러눕는다. 오른쪽 광대뼈를 중심으로 기미가 늘었고, 어깨가 빨갛게 타고, 얼굴까지 타면서 '아시안 뷰티'의 기준에서 멀어졌지만 흰 피부, 얼굴 잡티에 덜 집착하게 돼서 좋다.


얼마 전 읽은 기사에서 신문사를 퇴사하고 화가의 길을 걷는 인터뷰이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어디의 누구’라는 직책이 갖는 명예나 권위라는 껍질에 싸여 살았다"고 (한국일보 2018년 4월 13일 자 인터뷰). 사회적 자아가 사라지니 개인적 자아가 찾아왔다고. 그의 말처럼 사회적 자아를 버리니 개인적 자아가 찾아왔고, 개인적 자아 속에서 자유를 찾았다. 지금은 XX 회사의 누구, XX 신문사의 기자가 아니라 낯선 땅에서 오롯이 한국인 황수영으로 사는 중이다. '어디의 누구'였기 때문에 누렸던 혜택과 특혜가 사라지고, 좀 더 불안해졌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가끔씩 줄어드는 통장 장고 때문에 걱정이 많아지고, 불안하긴 하지만 자유는 언제나 불안을 동반하는 것이겠거니 하며 받아들이는 중이다. 그래서, 이렇게 좀 더 살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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