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리영 Jul 28. 2018

영국의 여름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영국에 와서 현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소리가 "여름이 짧다"는 얘기다. 특히 올해 5월 초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가 3일 정도 지속됐을 때 친구들과 나는 햇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짰다. 브리스톨에서 가장 오래 산 아일랜드 친구 A는 "이 날씨 놓치면 이제 끝이야. 이런 날씨는 이제 마지막이야. 철저한 준비로 이 날씨를 끝까지 즐겨야 한다"며 숲 속 소풍을 주도했다. 우리는 5월 첫째 주 일요일, 도시락과 술을 잔뜩 싸들고 핸드폰 시그널조차 잡히지 않는 숲 속에 가서 2018년 다시 오지 않을 여름을 즐겼다.


경험에 의존한 영국인들의 예측은 틀렸다. 5월에 끝났어야 할 화창한 날씨는 영국에 계속 등장했다. 비 구경하기가 어려워서 책가방 옆에 매일 꽂아뒀던 우산을 뺀 지 오래고, 방수 재킷도 한동안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했다. 여든이 넘은 교회 할머니 마가렛도 "이례적이야.. 영국에 이런 날씨가 참 드문데..."라며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누가 영국의 여름이 우중충하다고 했는가! 최근 3주간 이런 하늘을 보며 살았다. 영국 Devon의 한 해변에서 찍은 사진.


최고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가면 온 나라가 당황하는 듯했다. 가디언은 7월 23일 '기상청, 폭염주의보 내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그리고 '최고 기온 33도까지 예상, 뜨거운 태양 피해야'라는 부제목을 달았다. 기사를 가만히 읽어보니 30도를 웃도는 더위에 당황하는 영국인의 심리가 담긴 듯했다.


 -기사 일부 내용 발췌-


영국 남부 지역 낮 기온은 최대 30도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된다. 밤에도 이틀간 최고 기온이 15도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기상청 관계자는 '태양을 피하고, 집을 가능한 시원하게 만들어야 한다. 낮에는 창문을 가리거나 닫고, 밤에 시원해지면 창문을 열라'고 조언했다.


https://www.theguardian.com/uk-news/2018/jul/23/met-office-issues-a-heatwave-alert-and-tells-uk-public-to-stay-inside


응 뭐라고..? 더운데 창문을 닫으라고? 기상청 관계자의 조언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에어컨만 켜면 해결될 문젠데... 영국 최대 일간지가 30도를 웃도는 기온을 경고하고, 기상청이 더위 대처법을 알리는 기사를 내놓는 게 신선했다. 한국은 최고 기온이 40도까지 올라가야 '무더위 경고 기사'가 신문사에서 아이템으로 먹히는데, 영국의 더위 대처법은 귀여워도 너무 귀여웠다.  


# "에어컨 어딨어?"


영국에서 의도치 않게 무더운 여름을 보내며 이들이 왜 무더위에 긴장하는지 알 것 같았다. 최고 기온이 좀체 30도를 넘지 않는 이 나라에선 에어컨이 필수 가전제품이 아닌 듯했다. 영국에 처음 와서 가장 놀란 일은 이렇게 방값을 많이 받으면서 (학생 기숙사 월세가 한 달에 100만 원이다!)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에어컨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내 방은 물론, 공용 공간인 부엌에도 에어컨은 보이지 않았다. 에어컨은 최신식 식당에 가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영국에서 귀한 물건이었다.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찾은 펍에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야, 저기 에어컨이 있어!!!"라고 유레카를 외친 적이 있다.


영국 친구 T에게 "영국 기숙사에는 왜 에어컨이 없어?"라고 진지하게 물은 적이 있다. 에어컨 없는 오피스텔에 월세를 100만 원씩 내고 산다고 한국식으로 바꿔 생각하니 뭔가 억울했다. 그러자 T는 "음.. 필요 없으니까..? 에어컨 틀만큼 더울 때가 별로 없어"라고 무심하게 답했다. 영국의 에어컨 제조업체들은 큰 수익을 올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에어컨 없는 여름을 보낸 것은 유년기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도 그땐 선풍기라도 있었지, 선풍기 구매 시기를 놓친 외국인 유학생은 샤워를 한 뒤 손부채를 부치며 무더위를 달랬다. 후덥지근한 기숙사의 장점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도서관 체류 시간이 길어졌고, 논문도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버스, 기차, 에어컨이 없는 대중교통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낮 최고 기온이 30도를 웃돌 때 런던에서 버스를 탔다. 에어컨이 없는 2층 버스였다. 장시간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님이 걱정될 정도로 버스 안 온도가 높았다. 2층에 있던 한 외국인 승객이 너무 더웠는지 운전기사에게 다가가 조용히 항의했다.


2층에 있던 외국인 승객 : 위에 에어컨이 작동이 안돼요. 에어컨 좀 틀어주세요.


그러자 버스 기사 근처에 앉아 있던 영국인 할머니가 차분한 이렇게 말했다.


"이 버스엔 에어컨이 없어요."


브리스톨 템플 미드 기차역. 에어컨 없는 기차들이 당당하게 정차하는 곳이다.


# 에어컨 없는 기차, 차분한 영국인들


에어컨 없는 기차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최신식 기차를 타면 에어컨이 있었지만 연식이 된 기차에선 에어컨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손바닥 한 뼘 정도 창문이라도 열려 있으면 다행이었다. 시내버스야 아무리 장시간 타도 승차 시간이 1시간을 넘지 않으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기차는 사정이 달랐다. 짧게는 1시간 30분에서 길게는 5시간 넘게 타는데, 에어컨 없이 달리는 찜통 기차라니.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더위에 대처하는 영국인의 자세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손부채를 부치는 이들도, 승무원에게 "기차가 너무 덥다"라고 항의하는 승객도 없었다.


마침 한국에서 휴가차 영국을 찾은 한국 친구 두 명은 이런  영국 문화에 당황한 듯했다.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점잖은 영국인들을 보며 우리는 이 상황을 한국에 대입해봤다.


Q) 이 날씨에 KTX 에어컨이 고장 난다면?

A) '찜통 열차, 에어컨 작동 중단돼' 등등 기사가 나온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2525118&code=61121211&cp=nv


친구 한 명이 기가 막히게 비슷한 기사를 찾아냈다. 우리가 영국에서 더위로 고통받던 그 무렵 작성된 기사였다. '찜통 열차'에 탑승한 승객에게 코레일 측은 얼음 물수건과 생수, 그리고 요금 25%를 환불해줬다.


'찜통 열차'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는 의지의 영국인들, 나는 이들을 존경하기로 했다. 아.... 한국의 빵빵한 에어컨 바람이 정말 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 채식주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