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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Aug 10. 2018

조국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요즘 논문 작성의 최대 적은 '넷플릭스'라는 거대한 산이다. 친구가 추천해준 미스터 선샤인을 (자투리 시간에) 보면서 논문 작성 스트레스나 달래려고 했으나 친일파 이완용 썩을 놈과 당시 시대 상황에 몰입해서 감상하다 보니 3시간씩 연달아 보는 일이 발생했다. 한국을 떠나야 애국자가 된다더니, 이국 땅에서 보는 역사 드라마는 사람의 감정을 묘하게 만들었다.


# 일제 시대의 조선 소녀들  


내 전공은 '공공 정책'이다. 주변인들에게 전공을 말하면 다들 무슨 공부를 하는지 의아해한다. 그렇다. 나도 사실 공공 정책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면 답을 못한다. 1년이 지나고, 졸업할 때가 되니 우리 학과가 뭘 배우는지 대충 감이 왔다. 내가 에세이를 쓰며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이 '국가의 역할'이었다. 항상 노는 것 같이 보여도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을 하며 공부를 하고 있었단 말이다..


비록 좋은 점수는 받지 못했지만 가장 공들였던 과제는 위안부 여성을 주제로 쓴 'Gender and Violence' 수업 에세이였다. 위안부와 관련된 영문 책을 도서관에서 찾았을 땐 기분이 묘했다. 영어권 학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영문으로 위안부 실상을 전 세계 독자들에게 알렸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했다. 내가 이 주제로 에세이를 쓰기로 결심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성폭력을 연구하는 우리 교수님이 과거 한국이 주권을 잃었던 시절, 어리고, 힘없는 여성들이 일본에게 약탈당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약자를 노리는 것, 그것이 폭력의 속성이다. 어린 여자 아이, 얼마나 편한 타겟인가. 자, 이제 내가 공부한 것을 공유하도록 하겠다.


위안부 문제에서 가장 분통이 터진 것은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 보여준 일본인들의 악랄함이다. 첫째, 그들은 위안부를 모집한다고 하지 않고 '일본의 공장'에 일할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식으로 허위 광고를 했다. 또한 이러한 광고를 소작농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마을에서 했다. 그들은 큰 저항 없이 편하게 위안부를 모집하려고 조선 사회의 계급을 이용한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위안부 여성을 모집할 때 돈 없고, 빽 없는 조선인들을 노렸다. 김 모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할머니는 17살 때 중국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할머니네 가족은 농사 지을 땅은커녕 집도 없어 삼촌네 집에 얹혀살았다. 김 할머니는 입이라도 하나 줄여야 살림에 보탬이 되니 '일본 공장 노동자 구인 광고'를 보고 일본에서 돈을 벌려고 지원했단다. 그런데 그렇게 배를 타고 도착해보니,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었단다 (Howard et al., 1995). 이 썩을 놈들...



다른 논문에 따르면 양반 계급의 자녀들은 위안부로 팔려간 경우가 거의 드물었다고 한다. 위안부로 젊은 여자를 잡아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 때 조선 땅에서 세가 있는 부모들은 자녀들의 바깥출입을 금했고, 심지어 학당에도 못 가게 했다. 만약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만약 그 시대에 내 부모가 힘이 없었다면, 그래서 일본 공장에 취업하는 줄 알고 지원했다면, 내가 그들 중 한 명이 됐을지도 모른다. 나라가 위태롭고, 국력이 약할 때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자들은 계급의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조선의 가난한 딸들이 나라가 약해서 꽃다운 청춘을 참 모질게 보냈다.


도서관에서 찾은 책들


성폭력 수업 시간에 '매춘과 매춘법'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다. 매춘을 정의하기 전에 세상에 어떤 종류의 매춘이 있는지 토론했다. 그때 나는 일본 식민지 시절 조선 소녀들이 위안부로 끌려가도록 만든 국가적 매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때 수업 강사는 "근데 일본이 사과 같은 거 했지?"라고 말했다. Kind of apology 뭐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니요, 그건 사과가 아니었어요"라고 답했다. 강사는 "아.. 그래?? 오케이.. "하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대답하는 내 표정이 굳었나 보다.


강사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수업 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 '한일 위안부 합의'로 일본이 준 '위로금'은 사과가 아니었다. 지난해 대선 때 대선 주자들에게 한일 위안부 합의와 배상금에 대한 입장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한 대선 후보가 했던 말이 참 인상 깊었다. "대한민국이 못 사는 나라도 아니고, 세계에서 내로라는 경제대국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 돈이 없어서 받습니까? 돈이 아니라 사과를 받아야지요. 합의 다시 해야 합니다."


원래 사과란 가해자가 맘 편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가해자 위주의 사과는 해도 욕을 먹는다. 앞으로 일본과 우리나라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풀지 모르겠지만, 공공정책을 공부한 학생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더 이상 국가가 할머니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가의 역할은 그 나라 주권 안에 있는 시민을 지키는 것이라고 배웠다. 이건 대학원에서 배운 게 아니고 초등학교 사회 시간에 배운 거다.



https://www.youtube.com/watch?v=fGD_98dX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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