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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Sep 15. 2018

우리를 힘들게 하는 친구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이 글을 적을까 말까 고민했다. 구글 번역기의 엄청난 진보로 인해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내 친구들이 구글의 도움으로 내 블로그 글을 종종 읽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녀석의 이야기를 안 쓰고 넘어가자니 영국 유학 생활의 핵심 사건을 건너뛰는 기분이었다. 친한 멕시코 친구들도 "출신 국가와 이름을 숨기면 괜찮을 것"이라며 나를 격려했다. (왜냐면 얘들도 이 녀석 때문에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ㅋㅋㅋㅋ)


# 짜증 나는 상사 같은 친구, A


아프리카 대륙에서 온 A는 나와 공공정책을 함께 공부하는 동기다. 직업은 외교관. 처음에는 외모만 보고 온 가족을 데리고 뒤늦게 유학길에 오른 열정 충만한 아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와 동갑이었다. 적어도 여섯 살짜리 애가 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 "와이프랑 같이 왔어?"라고 물어봤다가 우정을 쌓기도 전에 우정에 금이 갈 뻔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


친해지기 전엔 A의 성격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함께 지나는 시간이 늘어나고, 우정이 쌓이면 쌓일수록 내 스트레스도 함께 쌓였다. A는 주변인을 귀찮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구글에 검색만 하면 나오는 정보를 꼭 주변인에게 물어봤다. 우리 학교는 에세이 각주를 달 때 '하버드 식'을 따른다. 이 방법은 학과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강의도 했고, 관련 파일을 학과 홈페이지에 업로드까지 했다. 게다가 하버드식 각주 다는 법은 구글에 검색하면 아주 상세하게 나온다. 한창 에세이를 쓰고 있을 무렵 A에게서 문자가 왔다.


A : 안녕

나 : 응, 안녕!

A : 너 하버드식 각주 다는 법 알지? 나한테 링크로 좀 보내줄래?

나 : (구글에 검색했더니 맨 위에 아주 상세하게 뜸! 링크를 보내주면서) 어, 여기 있어. 그런데 구글 검색하니까 바로 나오는데?

A : 고마워!


나한테 문자 보낼 시간에 구글 검색해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처음에는 뭐,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오늘 며칠이지?" "지금 몇 시지?"라고 물어보는 옛 상사가 떠오를 뿐이었다. 하지만 1년이란 시간을 같이 지내면 지낼수록 직접 정보를 찾지 않고 친구들이 정보를 대신 찾아주거나, 귀찮은 일을 대신해주기 원하는 그의 성격은 습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과 애들은 정보를 교류하기 위해 WhatApp에 그룹 채팅을 하나 개설했고, 친한 무리끼리 페북에도 그룹 채팅을 팠다. A는 이 두 개의 그룹 채팅에 질문을 가장 많이 올리는 사람이었다. 우리 학과는 '논문 핸드북'이라는 자료집을 발간해 그 속에 논문 쓰는 법 A-Z를 상세하게 다 설명해뒀다. 컨트롤 C와 V만 잘하면 원하는 정보를 다 찾을 수 있는데, A는 이 핸드북 대신 그룹채팅을 활용했다.


A : Hey, 얘들아 질문이 있어. 논문 쓸 때 글자 간격은 몇으로 했어?

(학과 그룹 채팅이 한동안 조용)

B : (착한 루마니아 친구) 나는 더블로 했어!

C : (나처럼 한 성격 하는 도미니카 공화국 친구) Hey, 핸드북에 검색해봐. 다 나와 있어!

A : (엄지손가락 들어 올리는 그 이모티콘으로 때움)


1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 나열할 수 없지만 이렇게 비슷한 일이 차고 넘쳤다. 얼마 전엔 멕시코 친구 이사벨이 A 때문에 겪었던 어려움을 토로했다. 지난 금요일, 이사벨과 나는 논문 마감 4일 전에 논문을 후딱 제출해놓고 홀가분한 기분을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그때 이사벨에게 온 문자 메시지. A였다. 문자를 확인한 이사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 : 이사벨, 왜 그래?

이사벨 : A 문잔데.. 논문 쓰는 것 좀 도와달래. 목차 자동으로 만드는 것 좀 만나서 가르쳐달라고 하는데.

나 : 그거 구글 검색하면 나오지 않아? 유튜브 동영상 강의 같은 거 보내줘 버려ㅋㅋ

이사벨 : 그리고.. 자기 논문 마지막으로 한 번 읽어봐 달래. (우리의 석사 논문은 참고 자료까지 더 하면 최소 70쪽이다)

나 : 너 시간 있어? 못 읽는다고 그래!!


우리가 논문을 끝내고 자유를 만끽하는 것을 안 A는 거절 못하는 착한 이사벨에게 이 같은 부탁을 한 것이었다. 논문 마감 3일을 앞두고 친구에게 70쪽에 달하는 논문을 읽고 피드백을 해달라는 내 친구 A. 오랜만에 맥주를 마시며 한껏 흥에 취한 우리는 다시 도서관에 가서 A의 논문을 읽고 싶지 않았다. 착한 이사벨은 이날 정중하게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만약 외교관인 A가 친구관계를 맺듯이 타국과 외교를 한다면 우방국가와의 수교도 끊어질 판이었다. (종종 선을 넘는 성적인 농담으로 우리를 경악케한 적도 있었으나 이 이야기까지 쓰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선 생략...)


# 부탁인 듯 부탁 아닌 부탁하는 너, A


A의 부탁은 가끔 아주 직접적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A의 생일. 생일 파티 시간은 5시였지만 이사벨과 또 다른 멕시코 친구 아나, 그리고 나는 조금 늦게 합류하기로 했다. 우리 말고도 빨리 도착한 친구들이 먼저 A를 축하해줄 것이고, 우리는 빨리 가봤자 술만 더 마시고, 돈이나 더 쓸 것이 뻔했기 때문에 조금 늦게 파티 장소인 펍에 도착하기로 했다. 이사벨, 아나와 수다를 떠느라 한동안 폰을 확인 못했다가 A의 생일 파티 장소로 출발할 무렵 폰을 다시 봤다. A에게서 부재중 전화 한 통과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A는 나에게 "안녕~~~~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Hello, could you do me a favour?)"이라는 무서운 문자를 보냈다..!! 또 무슨 부탁인 건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도 A의 생일이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나 : 미안해, 전화를 못 받았어. 무슨 일이야?

A : 응 괜찮아, 별거 아니고, 너 올 때 생일 케이크 좀 사 올래?


생일 케이크...? 생일 케이크...? 사가는 것은 문제없었지만 생일자가 자신을 축하할 케이크를 사 오라고 친구에게 부탁하는 문화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 직접적인 문자를 받고 아나와 이사벨에게 말했더니 그들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옆에 있던 영국 친구도 우리 이야기를 듣더니 "야, 걔 좀 특이하다.. 너 말고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케이크 사 오라고 한 거 아냐?ㅋㅋㅋㅋ"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건은 A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수많은 친구들 사이에서 케이크에 촛불을 불며 축하받고 싶은 욕심은 알겠지만, 케이크 사갈 마음이 전혀 없는 나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 생일 축하하려고 했던 마음까지 사라지게 만든 것이었다. 내 속이 좁은 건지, 그의 행동이 생각이 짧은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결국 케이크를 사 가기로 했다. 착한 내 친구들도 돈을 보태겠다며 되도록이면 '합리적인 가격'에서 해결하자고 했다.


A의 생일 파티가 열렸던 펍. 또 우째 이렇게 찾았는지 기가 막히게 풍경이 좋았다. 좋은 추억만 기억하자...


우리가 A의 케이크를 사기 위해 찾은 곳은 세인스버리. 정교한 영국식 자본주의는 슈퍼마켓에도 반영된다. 세인스버리 -> 웨이트로즈 -> 막스 앤 스펜서 식으로 가격대가 높아지고, 품질도 좋아진다. 우리는 A의 생일 케이크를 사기 위해 세인스버리로 향했다. 미안하다 친구야.. 그곳에서 반값 세일하는 2.5파운드짜리 케이크를 아나가 찾아냈고, 착한 이사벨은 "야.. 그건 아니야. 그래도 생일이잖아.."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우리는 합리적인 선에서 타협을 본 뒤 3.5파운드짜리 작은 케이크를 샀다. 한국에선 파리바게뜨, 투썸플레이스 같은 곳에 가면 최소 2만 원인데, 그래도 영국은 가격 선택의 폭이 넓어서 좋았다.


그렇게 케이크를 사서 A의 생일 파티 장소에 도착했다. 케이크를 본 A는 "야, 정말 고마워!!!"라며 활짝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케이크를 사지 않아도 우리를 그렇게 환하게 환영해줬겠지...? 내가 배배 꼬여서 저렇게 못돼먹은 생각을 하는 거겠지? A는 SNS도 하지 않는데 사진은 엄청 찍어대는 친구였다. 예전에 A와 함께 찍은 사진을 페북에 테 그해 올렸다가 "내가 확실히 말했지? 내 사진 왜 올린 거야? (I clearly told you! Why did you post this photo?)"라는 공격적인 문자를 받고 사진을 영구 삭제한 기억도 있다.. 아 얄미운 놈 진짜ㅋㅋㅋㅋㅋㅋ 이날 생일왕인 A는 브리스톨 명물인 클리프턴 서스펜션 브릿지를 배경으로 수십 장의 단체 사진과 독사진을 찍었다. DSLR을 들고 A 사진을 수십 장 찍어주던 A의 콜롬비아 친구는 나중에 "내가 사진사도 아니고 말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일찍 자리를 떴다고 한다. 아.. 너 진짜 왜 그러니ㅠㅠㅠ


A는 며칠 전 1년간의 영국 석사 과정을 끝내고 자신이 지원받았던 장학 프로그램의 목적대로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그가 나고 자란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단체 채팅방에 "A, 잘 가. 너와 함께 공부하며 보낸 시간들 정말 즐거웠어. 조심해서 돌아가!"라는 문자를 보냈다. 이 문장에 거짓은 없었다. 공부하며 보낸 시간들은 참 즐거웠기에, 그리고 A가 당분간은 그립지 않을 것이기에, 보고 싶을 것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한 가지 우려되는 일이 있다면 A가 발령을 받아 서울에 있는 대사관으로 올 경우다. 브리스톨에서도 나를 이렇게 귀찮게 했는데 만약 서울에 온다면 또 얼마나 나를 고단하게 만들까... 제발.. 하나님.. A를 아시아 국가에 발령 내지 마시고, 아프리카와 유럽 대륙을 영원히 떠돌게 하소서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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