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리영 Oct 05. 2018

이사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나는 이사가 싫다. 스트레스 강도를 1-10 척도로 측정한다면 이사 스트레스는 7 정도 되는 것 같다. 대학 때부터 시작된 자취 생활만 어언 10년이 훨씬 넘었고, 그만큼 더 나은 공간을 찾아 이동하는 고단한 시간이 잦았다. 가난했던 대학생 시절에는 하숙을 시작으로 친구와 방 하나를 나눠 쓰는 원룸 자취까지 해봤고, 직장을 구해 고정적인 수입이 생긴 뒤부터 원룸 월세부터 투룸 전세, 서울 역세권 오피스텔 전세 등으로 조금씩 삶의 질을 높였다. 어릴 때부터 동생과 방을 공유했던 나는 '내 방' '내 공간'에 대한 욕구가 컸던 것 같다. 고작 1년 살 전셋집 부엌에 페인트칠까지 해가며 돈을 발랐던 이유는 잠깐 머무는 공간이라도 집이 주는 편안함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영국에 오기 전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서울 오피스텔은 집을 잘 꾸며둔 덕분에 '집 꾸미기' 어플에도 소개됐다ㅋㅋ 자랑이다..


퇴사하고, 영국행을 결심할 때 가장 나를 흔들리게 했던 일은 다름 아닌 집이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내 방을 둘러보는데 전셋집이지만 그 집이 주는 안락함이 너무 컸다. 침대가 있었고, 그 앞에 책상이 있었고, 침실과 분리된 작은 거실이 있었고, 그 거실에서 친구들을 불러 놀 수 있었다. 이 집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포기하고, 10평도 안 되는 영국 기숙사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참 서글펐었다. 오피스텔을 정리하는데만 한참이 걸렸다. 서울로 이사올 때 이사를 도왔던 친한 친구 한 명은 내 짐을 본 뒤 "아.. ㅅㅂ. 이거 1인 가구 짐 맞나?? 4인 가구 아이가?"라며 정색한 적이 있을 정도로 짐이 많았다ㅋㅋ 이케아에서 사모은 소파와 침대, 책상 등 엄청난 가구들, 책 욕심이 많아 읽지도 않으면서 사뒀던 책들, 자라 세일 때마다 모셔온 엄청난 옷들, 그리고 3년간 정 붙인 식물들... (그 뒤로 웬만하면 옷을 사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아까운 돈이 옷값이다!!!) 가구와 옷은 필요한 친구들이 데려갔고, 100권 남짓한 책은 좋은 친구가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구입했다. 그렇게 텅 빈 집을 봤을 때 들었던 묘한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내 공간ㅋㅋㅋㅋ 저 작은 싱글 침대가 주는 안락함이 참 그리울 때가 있다.


영국에 와서 지금까지 총 세 번 이사했고, 한 번의 이사가 더 남았다. 부엌만 플렛 메이트와 공유하는 학교 기숙사에서 11개월을 살았고, 그 뒤 포르투갈 가족 집에서 한 달간 '밥 안주는' 애매한 홈스테이를 했다. 논문을 마감한 뒤 여행을 핑계 삼아 바르셀로나 친구 집에서 일주일, 세비야 친구 집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어차피 쓸 숙박비, 날씨 따뜻한 스페인에서 쓰자'고 생각하며 에어비앤비나 구해 한동안 정착할까 했지만 마음을 바꿨다. 힘들 때마다 항상 나를 도와줬던 런던의 중국 친구 집에서 잠깐 얹혀 지내고 있는 지금 지난 1년간 영국에서 지냈던 내 공간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1. 브리스톨 학교 기숙사


총 6인이 지내는 플랫. 부엌만 공유하고 자기 방에 독립된 화장실이 있다. 침대가 너무 작아서 친구가 놀러 올 때면 강제로 붙어서 잤던 기억이 난다. 특히 이번 여름은 에어컨도 없는데 유난히 더워서 둘이 침대에 엉켜 자다가 결국 하나가 바닥으로 내려가서 잤다. 약 1년간 살았던 '내 공간'이라서 나름 정도 많이 들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그림과 엽서를 곳곳에 붙여 소박한 인테리어도 했다.


작지만 편안했던 내 공간. 살 땐 시끄럽다고 그렇게 불평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또 그립다.

2. 포르투갈 가족과의 플랫 공유 - 국가대표 탁구선수 꿈나무를 위한 방


학교 기숙사 계약이 논문을 마감하기 전에 끝나는 바람에 급하게 브리스톨에서 한 달간 지낼 숙소를 찾아야 했다. 단기로 머무를 숙소를 찾는 게 쉽지 않아 카우치서핑 브리스톨 그룹에 글을 올렸다가 우연히 이 가족을 알게 됐다. 방을 처음 보러 갔다가 가격에 비해 너무 넓은 방, 더블 침대, 옷장 2개를 보고 놀랐고, 집주인이 제안한 주당 방세보다 "10파운드를 더 주겠다"라고 말하는 입방정을 떨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가 "세입자는 절대 방세를 올리는 게 아니다"고 등짝 스매싱당했다.


하지만 이 방에도 단점이 있다. 바로 방 안을 떡하니 차지한 정체불명의 탁구대다. 국가대표 탁구 선수가 꿈인 사람의 방을 꾸민다면 이 방 인테리어가 딱이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다. 처음엔 거대한 식탁 겸 책상이 생겼다고 좋아했지만, 이 탁구대를 볼 때마다 이것이 방인지, 창고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나중에 이 탁구대는 온갖 잡동사니를 올려두는 선반이 됐다.


두 번째 단점은 인터넷 연결이었다. 집이 지하여서 그런지 핸드폰 신호도 약했고, 와이파이는 안테나가 떴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넷플릭스를 보다가 속이 터져서 포기한 적이 다반사다. 집이 싼 데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내가 입방정을 떨어 10파운드를 더 내고 살았구나.. 앞으로 집을 구할 땐 '인터넷 상태'도 꼭 확인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문제의 탁구대. 계약 조건이 "탁구대와 같이 지내야 한다"였다.


3. 여기서 1년 살면 좋겠다, 바르셀로나 친구 집


일주일간 지냈던 바르셀로나 친구 집은 천국이었다. 탁구대 인테리어와 나의 인내심을 시험했던 와이파이 상태로 삶의 질이 한없이 떨어졌던 브리스톨의 마지막 거처. 그곳에서 지냈던 지냈던 한 달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ㅠㅠ


영국에서 1년간 어쩔 수 없이 한식을 직접 해먹으며 요리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 믿은 나는 친구네 커플에게 다양한 한식을 선보이려 했으나, 오히려 엄청난 분량의 한식을 얻어먹고 돌아왔다. 친구네 커플은 일주일 단위 식단을 이미 완성해놓은 듯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식탁에 차와 간단한 아침 식사가 준비돼 있었고, 점심과 저녁으로 한국과 스페인, 이탈리아 맛이 어우러진 다양한 요리가 등장했다. 메밀국수, 떡볶이, 배추전, 떡꼬치, 된장찌개, 볶음밥... 1년간 못 먹었던 한식을 이 집에서 일주일간 다 먹은 듯하다. 마음이 예쁜 커플은 집도 참 예쁘게 꾸며놨다. 라벤다를 말려서 걸어둔 거실 벽면은 볼 때마다 마음이 포근해졌다. 내가 두고두고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정도로 잘 대접받고 왔다.


내 옷장까지 만들어준 친구의 따뜻한 마음.


브리스톨의 마지막 날, 친구들과 조졸한 저녁 식사를 했다. 기숙사 계약 만료 이후 나의 방 구하기 전쟁을 곁에서 쭉 지켜봤던 이탈리아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수영, 한 달 단위로 살아가는 네가 참 대단하다. 난 그렇게 못하겠어." 무슨 말인지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마음 편하게 돌아갈 내 집이 없다는 그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하루빨리 취업해서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은 이유는 다시 내 공간을 되찾고 싶어서다. 작지만 내 공간, 내 방이 주는 안락함을 다시 느끼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친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