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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Jul 18. 2018

채식주의자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영국 브리스톨, 이곳은 채식주의자들의 성지다. 브리스톨의 홍대로 불리는 (그냥 내가 편하자고 붙여봤다) Stokes Croft 지역엔 한 집 걸러 한 집 꼴로 비건 레스토랑이 있는 듯했다. 고기가 식탁을 지배하는 한국에선 채식주의자를 보는 게 희귀한 일이었지만 브리스톨에선 돌 던지면 맞는 사람이 거의 다 채식주의자인 듯했다.


채식주의자에도 등급이 있다. 먼저 페스카타리안 (pescatarian), 고기는 먹지 않지만 생선, 해산물은 먹는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생선을 빼면 베지터리안 (vegitarian)이 되고, 여기에서 한 단계 나아가 유제품과 계란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비건 (vegan)이 된다. 어쩌다가 베지터리안 친구들을 곁에 많이 두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제일 친한 멕시코 친구 둘 다 베지터리안이고, 나의 '특별한 친구' 영국 친구 T도 페스카타리안이다.. 그래서 이들과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면 나눠 먹으려고 채식 메뉴를 시켰고, 도시락을 싸갈 때도 고기를 빼는 대신 단백질을 대체할 수 있는 콩, 브로콜리를 넣어갔다. 그들과 약 1년을 함께 지냈더니 의도치 않게 2주 가까이 고기를 먹지 않고 지내는 나를 발견했다. 베지터리안 친구들도 "수영은 이제 거의 베지터리안이야"라며 나에게 자연스레 채식을 전도했지만 얼마 전 프랑스에서 먹은 닭강정을 생각하며 그들의 복음을 거부했다.


여기선 가끔씩 나 같은 육식주의자(?)들이 소수가 되는 일도 발생한다. 얼마전 과 친구의 공연을 보러 펍에 갔다가 새로운 친구 몇 명을 만났다. 나, 중국인, 영국인 3명, 이탈리아인 1명이 모인 소박한 테이블에서 음식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마른 체형의 이탈리아 친구 D를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나 : 혹시.. 너도 베지터리안이니?

D : 응, 맞아. 근데 어떻게 알았어?

나 : 아, 그냥 그럴 것 같았어.. (야 인마, 내 사방에 다 베지터리안이다ㅋㅋㅋㅋ)


그렇게 전수조사를 해보니 결과는 이랬다. 나와 중국인, 두 아시아인만 빼고 죄다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조금 더 상세히 분류하면, 영국인 2명은 비건, 한 명은 페스카타리안이었고, 이탈리아 친구 D는 베지터리안이었다. 이탈리아 친구의 식성은 의외였다. 프레스코! 그 얇고 짭짤한 베이컨의 고향이 이탈리아가 아닌가. 이탈리아인들도 스페인 사람들만큼이나 고기를 사랑하는 민족이 아니던가. 이렇게 브리스톨은 전 세계에 숨어있는 베지터리안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브리스톨 명물 클리프턴 서스팬션 브릿지에서 보이는 풍경. 자세히 보면 저 거대한 돌덩이 위에 'GO VEGAN' 이라고 적혀 있다ㅋㅋ


페스키타리안용 김밥ㅋㅋ 베지터리안 친구들껀 참치를 빼야한다...


# 골고루 잘 먹을 필요가 없다


내 친구들이 베지터리안이 된 이유는 제 각각이었다. 모든 종류의 살육에 반대해 4년 전 베지터리안이 된 친구도 있었고, 온 가족이 베지터리안이어서 자연스레 어릴 때부터 고기를 먹지 않아 평생을 베지터리안으로 산 친구도 있었으며, 그냥 고기가 먹기 싫어서 베지터리안이 된 친구도 있었다.


영국 친구 T는 생명을 죽여선 안된다는 삶의 철학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놈이었다. T가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파리 한 마리가 부엌을 누비며 귀찮게 하길래 "저 파리 좀 잡아달라"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T는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수영, 나 베지터리안이야. 난 생명을 안 죽여." 난 "저 파리가 네 친구를 괴롭히고 있는데 키 큰 니가 좀 죽여주면 안되겠어?"라고 반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베지터리안인 베프 멕시코 친구 이사벨에게 "T는 '베지터리안'이어서 파리도 안 죽인대. 너도야?"라고 묻자 이사벨은 "내가 여태 죽인 파리가 수 백 마리는 될 거야. 그거랑 상관없어ㅋㅋㅋ"라고 쿨하게 말했다.


한국에서는 골고루 잘 먹어야 먹을 복이 있다고 한다. 내가 자주 했던 말도 "저 다 잘 먹어요"였다. '입맛이 까다롭다' '식성이 별나다'는 말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깔린 이유도 다 잘 먹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는 우리나라 문화의 영향이 큰 것 같다. 김밥에 오이만 골라서 빼놓는 친구가 "쟤 참 입맛 까다롭다"라는 눈총을 받는 걸 본 적이 있다. 개인의 취향일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획일적 가치보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음식 문화에도 녹아있는 듯했다. 친구 집에 초대받을 때도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못 먹는 거 있어?"라는 질문이다. 누구는 생선까지 먹고, 누구는 유제품도 아예 못 먹으니 똑같은 음식을 한솥 끓여서 다 같이 나눠먹는 건 생각하기 힘들다. 포르투갈 친구 집에 초대받았을 땐 베지터리안 친구 한 명을 위해 그가 별도의 메뉴를 만들었고, 나 역시 잡채와 김밥을 만들 때도 쇠고기를 뺀 베지터리안 버전, 참치를 넣은 페스카타리안 버전 등으로 친구들의 다양한 입맛을 존중했다. 솔직히 말하면 겁나 귀찮았다.. 하지만 지금은 똑같은 제목의 요리를 고객 입맛에 맞춰 다른 버전으로 내놓는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식성도, 삶도, 모두가 똑같을 필요가 없는데, 우린 어쩌면 한국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도록 사회의 압박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4년제 대학에 들어가고, 4대 보험이 되는 직장에 정규직으로 취업하고, 서른 즈음 결혼하고, 애를 낳고,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처럼 보이는 사회다. 대학을 가지 않거나, 서른 즈음 결혼을 하지 않거나, 결혼해서 애를 낳지 않거나, 혹은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하거나, 잘 보이는 곳에 문신을 했거나, 사회가 정한 기준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별나다'는 소리를 듣는다. 채식주의자 이야기를 하다가 어쩌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뻗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우리나라가 다름을 조금 더 존중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고기를 안 먹고, 술을 안 먹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식성을 강요하지 않는 사회, 딱 회식자리에서부터 이런 변화가 시작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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