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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Oct 31. 2018

수고한 나에게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철없는 30대. 내가 지은 브런치 매거진 이름처럼 참 철이 없었다. 그냥 유학이 가고 싶었다. 2017년 5월 처음 브런치를 시작했던 것은 영국에서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회사에 1년 6개월 휴직을 하고 영국 유학을 다녀온 직장 동료가 있어 나도 그렇게 해볼까 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사표를 썼다. 우리 과 동기들 중 많은 이들이 다니던 직장을 1년간 휴직하고 석사 학위를 따러 왔다. 그래서 9월 무렵 친구들은 논문을 제출하고 썰물처럼 영국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페이스북에는 각자의 나라에 돌아가 지내는 사진이 올라왔고, "I miss Bristol"이라는 포스팅이 자주 등장했다. 다들 직장이 있으니 이제 열심히 돈을 벌고 있겠지.. 석사 논문 하나를 쓰기 위해 1년간 이렇게 달려왔었는데, 그 논문을 다 쓰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돌아갈 직장이 없으니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2017년 9월-2018년 9월 1년의 학위 사이클이 끝나고 나니 새로운 학생들이 브리스톨을 채웠고, 이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나는 꼭 이방인 같았다. 어쩌면 이 기분이 싫어서 브리스톨을 떠나 이 비싼 런던으로 왔는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10월 석사 과정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연습 에세이를 썼을 때 50점이 안 되는 점수를 받고 좌절했다. 교수님은 피드백에 이렇게 적었다. '에세이는 주어진 질문에 답하는 거다. 이런 식으로 진짜 에세이 제출하면 낙제한다',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왜 묻는 질문에 답 안 하고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느냐는 이야기였다. 진짜 학점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 연습 에세이였지만 그날 하루 종일 우울했고, 도서관에서 친구를 만나 울었던 것 같다.. 찌질하게ㅋㅋ 그게 뭐라고.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하면서 월급을 받았는데 낙제점을 받으니 더 자존심이 상했다.


영국 대학교, 대학원의 성적 체계는 이러하다. 50점 이하 Fail (에세이나 논문 다시 제출해야 함), 50~59 Pass, 60~69 Merit (이 점수를 받으면 대개 만족한다), 70점 이상인 Distinction. 100점 만점에 70점 하고는 다른 시스템이다. 에세이를 써서 80점을 넘긴 친구도 한 명 봤는데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지난주 혼자 콘월을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생각 정리도 하고, 혼자서 책도 읽고, 영국에서 하는 마지막 여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콘월에서 지낸 일주일간 두 개의 이메일을 받았다. 하나는 두 달 전 면접을 봤던 회사의 불합격 통보 이메일. 꼭 가고 싶었던 회사여서 많이 실망했다. 두 번째로 기회를 얻어 인터뷰를 봤는데, 또 떨어져서 속이 더 상했다. 하지만 의외로 쉽게 불합격을 받아들였다. 내 약점이 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보다 더 뛰어난 지원자가 있으면 채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30대 초반의 취업 준비생은 8년 전 구직 활동을 할 때보다 인내심이 많아졌고, 고용주의 입장을 헤아리는 이해심도 늘어났다.


그다음 날 학교에서 온 이메일을 받았다. 12월 초쯤에 나온다던 논문 결과가 생각보다 일찍 나왔다. 조용했던 채팅방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안드레아가 지금 한 명 한 명씩 논문 점수 보내고 있나 봐!" 가장 먼저 점수를 받은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과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친절한 안드레아(미안해요 안드레아...)는 행정 업무에 서툴러 여러 가지 실수를 많이 하기로 유명했다. 예를 들자면, 에세이를 제출한 친구에게 이메일을 보내 "너 아직 에세이 제출 안 했어. 언제 제출할거야?"라고 묻기도 했고, 영국 친구 한 명은 안드레아의 행정 실수로 과 명단에서 이름이 빠졌는지 1년간 단체 이메일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행정력으로 무장한 한국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 안드레아는 큰 사고 없이 80여 명의 과 동기에게 논문 점수를 잘 전달한 모양이었다.  


콘월에 가면 꼭 먹어야 한다는 콘월 크림티. 혼자서 소박한 논문 통과 파티.


비를 피해 잠깐 들어갔던 빈티지샵에서 이메일을 열었다. '공공정책 석사 과정 논문 결과'라고 적힌 이메일을 보자 가슴이 떨렸다. 제발... 그냥 Pass는 싫어요, 하나님. 나 진짜 열심히 논문 썼단 말이에요.. 나 없는 돈 다 털어서 등록금 냈단 말이에요... 떨리는 마음으로 첨부 파일을 확인했다.


빨간색으로 적힌 점수를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Distinction이었다. 가게 밖으로 나가 차근차근 성적표를 확인했다. 논문 피드백에는 장점과 함께 보완해야 할 점이 함께 적혀 있었다. 마지막 문장을 보자 눈물이 울컥 터졌다. 채점자는 내 논문이 아주 좋은 논문이라고 했다. 연습 에세이를 쓰고 50점도 안 되는 점수를 받았을 때만 해도 영어로 15000자나 되는 논문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는데, 내가 해냈구나. 한글로도 안 써본 영어 논문을 쓰느라 역사상 유례없이 화창했던 2018년의 영국 여름을 도서관에서 보냈던 그 기억이 떠올랐다.


공부에 큰 소질 없는 내가 논문을 무사히 제출하고, 성적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인들의 도움이 컸다. 대학원 공부가 어려워 고군분투하는 나를 보고 "적당히 대충 하고 공부가 힘들면 그냥 돌아와도 된다"고 위로해준 나의 멘토, 친구의 논문을 위해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준 10명의 기자 친구들, 도서관에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힘들 때마다 버팀목이 돼준 과 동기들,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어보고 피드백을 준 지도 교수님. 공부는 결코 쉽지 않았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분에 석사 여정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1년간 수고한 나에게 칭찬해주고 싶다. 남의 나라에 와서 남의 나라 말로 공부하느라 고생했다고, 이제 좀 놀아도 된다고. 1년간 아끼면서 잘 살았으니 내일은 나에게 70파운드짜리 옷 하나 선물해야겠다. 새 옷 살 거다. 새 옷!!!!!  


1년 공부의 결과물. 고생했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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