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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Nov 02. 2018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2018년 11월 1일, 영국 런던> 


벌써 네 번째 이사다. 1) 브리스톨 학생 기숙사 2) (탁구대와 함께 살았던) 브리스톨 홈스페이 3) 런던 친구 집 4) 런던 에어비앤비. 신기하게도 이사할 때마다 짐이 줄었다. 한국에 짐을 두 박스나 부친 탓도 있지만, 이사를 하도 자주 다니다 보니 가져갈까 말까 고민되는 물건이나 옷은 버렸다. 짐 때문에 강제로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게 됐다. 


런던 친구 집에 한 달이나 얹혀 지냈더니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지내면 지낼수록 몸과 마음이 더 편해졌다ㅠㅠ 두 살짜리 친구네 아들놈과는 격 없이(?) 지내는 이모 조카 사이가 됐고, 친구 아들은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아이~~~아이~~~ (중국어로 이모를 뜻한단다)"를 부르며 나를 찾았다. 친구가 늦게 오는 날이면 친구 남편과 나, 친구 아들 이렇게 셋이 거실에서 TV를 보며 저녁을 먹으며 수다도 떨었고, 점점 그렇게 그 가족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이런 천사 같은 친구네 가족을 런던에서 만난 것은 정말 복 중에 복이었다. 친구 집에서 이사 나가기 전 며칠 전 밖에 있던 친구가 문자를 보냈다. 


'언니, 남편이랑 상의했는데 언니 우리 집에 더 있어도 돼. 에어비앤비 취소할 수 있으면 취소해. 우리는 언제나 환영이야.'


그 문자를 받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돈도 없고, 집도 없는 내가 자존심 상해할까 봐 조심스레 문자로 이야기하는 친구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다. 영국에 사는 동안 에어비앤비를 취소하고 친구네 집에 살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에어비앤비는 애매한 환불 정책으로 내가 친구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 체크인 5일 전에 취소해야 전액 환불, 그 이후에 취소하면 에어비앤비 중개 수수료를 제외하고 숙박비의 50%만 돌려주는 것이었다. 630파운드 정도 방값으로 냈지만 취소하고 나면 내 손에 남는 돈은 253파운드였다. 


제일 작은 캐리어 하나는 친구네 집 거실에 남겨두고, 캐리어 두 개와 전기장판만 들고 에어비앤비 숙소로 출발했다. 친구는 안 그래도 바쁠 텐데 50분 거리를 운전해 숙소에 데려다줬다. 새 동네의 분위기는 친구네 동네와 조금 달랐다. 새 동네는 Brixton 옆 동네. 런던 사람들은 Brixton 이야기만 들으면 "왜 거기에 집을 구했냐"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봤었다. 런던에서도 위험한 동네로 이름이 나 있는 모양이었다. 친구 남편도 내가 이곳으로 이사한다고 했을 때 "살다가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우리 집으로 오라"며, 그래도 다행히 Brixton에 집을 구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도대체 어떤 동네길래...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해서 호스트를 만났다. 성격이 밝은 중년 남성이었다. 하지만 할로윈에 3kg짜리 호박을 세 개 산 이야기를 실컷 하시며 보여준 나의 숙소는 청소가 전혀 돼있지 않았다. 인덕션에는 먼지가 자욱했고, 토스트기와 전기 주전자 역시 식빵을 구워 먹거나 물을 끓여 마시면 병에 걸릴 것 같았다. 최악은 아니었지만 이런 방을 한 달에 600파운드나 넘게 받다니, 속이 상했다. 방을 확인한 친구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우리는 항상 영어로 이야기했지만, 호스트를 의식한 친구가 갑자기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언니, 여기 살고 싶어? 나 여기 이상해."


급한 약속이 있었던 친구는 차를 몰고 다시 떠났고, 나는 이 더러운 방을 호스트와 함께 치웠다. '나 청소료까지 냈잖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분쟁을 막기 위해 참았다. 참자, 내가 참자... 내가 물걸레로 방바닥을 닦고, 호스트는 오븐의 찌든 때를 칼로 긁어냈다. 저 칼이 내가 써야하는 부엌칼이 아니길 바랐다. 호스트는 착한 사람 같았지만, 방 상태는 착하지 않았다. 다른 세입자들과 함께 쓰는 화장실과 샤워실 상태도 5점 만점에 2.5점 정도였다. 언급하고 싶지 않다ㅠㅠ 


방에 혼자 남아 침대에 전기장판을 깔고 있는데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언니, 나는 그 집 마음에 안 들어. 취소할 수 있으면 취소하고 우리 집으로 와. 내가 토요일에 다시 데리러 갈게." 내가 쾌적하지 못한 환경에서 사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친구는 계속 자기네 집으로 다시 오라고 했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400파운드 가까운 돈을 허공에 날려버릴 생각을 하니 속이 쓰렸다. 그리고 친구네 가족에게도 손님 없이 오롯이 3인 가구의 즐거움을 느끼는 자유를 주고 싶었다. 친구에게는 고맙다고, 생각해보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혼자 펍에 가서 햄버거와 맥주를 마시며 이 집에서 딱 20일만 지낸 뒤 다시 결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물 때가 잔뜩 낀 저 전기 주전자는 아무리 차가 마시고 싶어도 쓰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깨끗한 전기 주전자 하나 사서 한 달만 쓰자.. 


오늘은 쾌적하지 못한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지내는 첫날이다. 슈퍼에 가서 장을 봐 냉장고를 채워 넣고, 책상과 바닥을 다시 한번 닦았다. 넷플릭스로 'Bridget Jones's Baby'를 보는데 브리짓의 아파트가 너무 예뻐서 질투가 났다. 난 이 방에도 한 달 방세로 우리 돈 100만 원을 썼는데, 도대체 런던 중심가에 있는 방 하나, 거실 하나인 아파트에서 '혼자' 사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들까. 이런 현실적인 생각을 했다. 그리고 넓진 않았지만 침실과 거실이 분리돼 있었던 쾌적한 서울 내 집이 생각 나 서글펐다. 언젠가 2018년 11월을 떠올리면 런던에서 혼자 궁상맞게 살았던  이 삶 조차도 그리워하는 날이 오겠지. 그래서 오늘의 감정을 기록하기 위해 노트북을 켜서 일기를 쓴다. 아, 치약이 없다. 오늘은 소금으로 양치질하고 내일 아침에 사러 가야겠다. 이 동네는 위험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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