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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Jan 13. 2019

안녕, 서울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영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 딱 한 달. 1년 3개월간 영국에서의 기억이 희미해질 정도로 빠르게 한국 생활에 적응했다. 운동할 때 입는 검은 레깅스에 얇은 패딩 점퍼 차림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한 나를 배웅 왔던 친구 P는 내 옷차림을 보고 혀를 찼다. "얘가 참 서울 날씨 모르네ㅋㅋㅋㅋ 얼른 두꺼운 옷 꺼내서 입으라"며 매서운 서울 날씨를 알려줬다.


인천공항 식당가에서 비빔국수와 김치찜을 주문했다. 런던에서 김밥 한 줄에 5파운드, 우리 돈 7500원을 주고 사 먹었던 기억이 겹쳤다. 이 맛있는 음식 두 개를 동시에 주문해도 2만 원이 넘지 않다니. 그래, 이곳이 내 조국이다! 이곳은 한식의 본고장, 대한민국이다!!


인천공항의 김치찜. 한국에서의 첫 끼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뭐가 먹고 싶냐"며 밥을 먹였다. 고기요, 고기!!ㅋㅋ
동생이 차려준 정갈한 밥상. 반찬은 시댁, 친정에서 공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 달간 많은 일이 있었다. 고향집에 가서 아빠와 며칠을 보냈고, 내가 없는 사이 엄마가 된 동생네 집에 가서 조카를 만났고 (너무 작고 귀여웠다. 꼬물꼬물 대는 그 손이 자꾸 생각난다),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며 여태 못 만났던 친구들을 만났고, 몇 주 전 취업까지 해버렸다. 모 방송사 다큐멘터리 제작팀에서 사람을 뽑길래 지원을 했다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면접을 봤고, 지금까지 계속 근무 중이다. 역시 비자 문제없는 대한민국에서는 이렇게 취업이 빠르게 진행된다.


1년 반 전, 서울을 완전히 떠날 것처럼 집을 정리했다. 침대부터 소파까지,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물건을 다 처리했고, 미니멀 라이프를 해보겠다며 몇 번 입지 않은 옷들도 친구들에게 모두 넘겼다. 다시 침대를 사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자니 '무료 나눔'으로 내 침대를 가져갔던 얼굴도 모르는 낯선 남자가 갑자기 부러워졌다. 당신 참 운이 좋았군요.. 그렇게 큰 마음을 먹고 서울을 떠날 때는 2019년 1월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참 궁금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 대도시로 다시 돌아왔다.


10월 말, 영국 콘월에서 혼자 여행을 하며 두 개의 이메일을 받았다. 정말 일하고 싶었던 영국 회사로부터의 불합격 통보와 석사 논문 결과를 차례차례 받았다. 그 낯선 곳에서 일주일간 참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내가 잘하는 게 뭘까, 하고 싶은 게 뭘까. 잘한다고 생각했던 일은 의외로 잘하지 못했고,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일에서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공부를 은근히 즐긴다는 사실도 영국에서 1년간 빡빡한 석사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것이다.


어차피 시작한 공부, 연구하고 싶은 분야가 생긴 만큼 앞으로 조금 더 오래 해보기로 했다. 영국이 될지, 다른 나라가 될지, 어디가 될진 모르겠지만 가방 끈을 더 늘리기로 결심했다. 친한 대학 친구들은 둘째를 낳으면서 대부분 4인 가구를 완성했고, 대한민국 사회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생을 꾸려가고 있다. 나 비록 친구들과 조금 다르게 살고 있지만, 그냥 이렇게 조금 더 불안하게 살기로 했다. 지난 1년 3개월간 영국 생활을 통해 얻은 교훈은 불안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안정과 행복이 비례한다고 가정했던 이유는 안정적인 직업과 소득 (+ 남자 친구)가 있어야 행복하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어릴 때부터 주입식 교육을 받은 탓이었다. 외국인 학생으로 사회적 자아를 버리고 오롯이 나로 살면서 더 자유로웠고, 돈이 없어도 당당해지는 법을 배웠고, 그지 같은 놈들을 만나 감정 소모하는 것보다 혼자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울 때 삶이 더 행복해진다 사실을 알게 됐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앞으로 한국살이에 지쳐서 또 내 인생이 어영부영 흘러가버릴까 봐 겁이 나서다. 올해 가을, 나는 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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