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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Feb 04. 2019

문컵 우정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런던에 정착한 지 두 달이 조금 안됐을 때였다. 런던 친구라곤 같이 사는 중국 친구 L의 가족, 일요일에 만나는 교회 사람들, 브리스톨에 함께 런던으로 터를 옮겨온 과 친구 Y가 전부였다. L은 새 사업 준비로 이것저것 바빴고, Y도 구직 활동 끝에 풀타임으로 취업하는 바람에 런던 백수는 평일에 놀 사람이 없었다. 친구에 굶주려갈 때쯤 한국 음식이 그리워 찾았던 한식당에서 본 행사 광고가 생각났다. 런던에서 열리는 '런던 한국영화제'였다.


내 관심을 끈 것은 'For Vagina's Sake'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였다.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한국에서는 '피의 연대기'라는 제목으로 개봉해 한때 큰 관심을 끈 듯했다. 한국 여성 감독이 생리를 주제로 만든 다큐라고 하니 더 관심이 갔다. 교회 친구 몇 명에게 제안했지만 나와 생리 영화를 함께 볼 동지를 찾지 못해 결국 혼자 그곳으로 향했다. 영화제가 열린 곳은 대영박물관, 영국에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둘러보지 않은 곳이었다 (사실 지금도 영화제만 갔다 왔을 뿐 전시품을 둘러보지 않았다ㅋㅋ). 시간에 맞춰 간다고 갔는데 보안 검색을 통과한 뒤 거대한 박물관 속에서 분주하게 영화제 장소를 찾다 보니 영화 상영 시간이 지나 버렸다. 공짜 영환데, 그리고 런던에서 열리는 한국영화제인데, 이대로 헛걸음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영화 상영 시각이 10분쯤 지났을 때였지만 나의 간절함을 눈치챘는지 융통성 있는 직원이 상영관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속삭이는 목소리로 길게 "땡큐~~~~"라고 말했다. 어두운 상영관 속에서 맨 뒷자리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그렇게 1시간 반 정도 영화를 봤다. 영화가 끝난 뒤 상영관이 밝아졌고 주변을 살펴봤다. 한국인뿐 아니라 다양한 인종과 성별이 뒤섞여 한국 영화감독이 만든 '생리 영화'를 런던에서 함께 봤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제야 옆에 앉은 관객도 한국인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가 먼저 인사했다.


나 : 안녕, 영화 재밌게 잘 봤어?

그녀 : 응, 안녕? 굉장히 인상적이었어. 난 아직 문컵이 무서워서 한 번도 안 써봤는데 한 번 써볼까 싶어.

나 : 아 그래? 난 지금도 문컵 착용하고 있는데ㅎㅎ 문컵 종류도 저렇게 다양한지 몰랐네


그렇게 처음 본 그녀와의 '생리 토크'가 자연스레 시작됐다. 다큐가 끝난 뒤 화장실에 가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P는 한국 영화를 좋아해서 이 영화제를 일부러 찾아왔다고 했다. P는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을 좋아한다고 했고, 나는 그 영화는 좋아하지만 감독은 싫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미투 운동'에 연루된 김기덕 감독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몇 마디 대화였지만 P와의 대화가 참 즐거웠다.


나 : 너 바빠? 난 하나도 안 바쁜데... 시간 괜찮으면 차나 한 잔 할래?

P : 나도 안 바빠! 그래, 좋아!


런던한국영화제. 역시 영화제는 친구를 사귀기 좋은 장소다.


우정이든, 연애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을 때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친절한 오스트리아 사람 P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내가 초대한 티타임이었는데 P는 굳이 자기가 계산하겠다며 나를 밀어냈다. 우리는 참 공통점이 많았다. 비슷한 시기에 이 거대한 도시, 런던으로 이사와 친구가 별로 없었고,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고 (특히 한국 영화), 미술관 관람, 서핑, 요가와 필라테스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는 할 때 P가 더 좋아졌다. "런던은 참 친구 사귀기 힘든 곳이야. 사람들이 다 바쁘니까.."라고 말할 때 나는 그녀가 내 마음을 읽은 줄 알았다. 특히 P가 영국인들도 모르는 동네 토트네스에서 1년을 살았다고 했을 땐 소름이 돋았다. 그곳은 내가 브리스톨에 있을 때 거의 주말마다 놀러 가다시피 한 동네였다. 나도 놀랐고, 그녀도 놀랐다.


나 : 너 토트네스에 B 해변 알아? 가봤어?

P : 당연하지. 나 거기서 서핑도 했는데?


화장실에서 오줌만 누고 웃으며 헤어졌다면 평생 후회할 뻔할 인연이었다.  토트네스 친구에게 P 이야기를 했듯이, P도 남자 친구에게 런던에서 신기한 친구를 만났다고 자랑한 모양이었다. P를 만나고 온 날 저녁, 기분이 너무 좋았다. 두 달이 다 되도록 정이 들지 않는 런던에서 우연히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아서였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도 그랬다. 처음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외로운 기분이 들어 힘들었지만 낯선 도시에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며 서서히 정을 붙였다 (그렇게 서울에서 만나 우정을 쌓은 친구 중 한 명은 브리스톨까지 놀러 오기도 했다).  


그 뒤 만남 뒤에도 우리는 몇 번 더 만났다. 많이 추웠던 날 테이트 모던에 가서 전시회를 봤고, P의 초대로 런던 중국영화제에도 같이 갔다. 다른 친구를 만나러 토트네스에 갔을 땐 P가 추천한 가게에 가서 피자도 먹었다. 문자 한 통을 보내도 건성으로 쓰지 않는 P의 배려심과 차분한 성격은 참 닮고 싶은 부분이었다.


중국 영화를 함께 봤던 날이었다. 영국이 언제나 그렇듯 옷을 흠뻑 적실만큼의 비는 아니었지만 짜증 나게 보슬비가 계속 내려 추웠던 날이었다. 영화를 본 뒤 자전거를 끄는 P와 함께 거리를 걸었다. 그때 난 지원 마감이 코 앞으로 다가온 독일 박사 과정 지원서 작성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한 상태였다. P에게 내 결심을 말했다.


나 : 나.. 저번에 말했던 박사 과정 지원 안 할까 봐... 마감까지 시간도 얼마 안 남은 데다 교수님들한테 추천서까지 받아야 하는데 아직 부탁하지도 않았어. 급하게 마감에 쫓겨서 부탁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냥 포기하려고.


그때 P는 차분하게 말했다. 박사 공부하겠다고 하는데 추천서 안 써줄 교수가 어딨겠냐고, 급하다고 상황을 설명하면 분명해줄 테니 일단 이야기부터 해보라고 했다. 나는 또 독일에서 고등학교 졸업장까지 제출하라고 하는데 그 서류는 한국에 내가 직접 가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고 변명했고, P는 "베를린은 독일에서도 가장 독일 같지 않은 도시로 유명해. 그만큼 덜 엄격하고 융통성이 있다고! 일단 이메일이나 전화를 걸어서 사정을 설명하고 다음에 내면 안되느냐고 물어보라"라고 조언했다. 내가 되지 않을 이유를 설명하면 P는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두 가지씩 대는 현명한 친구였다.


찌질한 친구가 못하겠다고 물러설 때 잡아준 P가 있어서였을까. 독일 대학원에서 보낸 이메일이 아이폰 스크린에 떴다. '추천인의 추천서 제출이 늦어서 곤란한 지원자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신들의 상황을 배려해 원서 접수를 며칠간 연장하겠다'는 내용의 친절한 이메일이었다. "더 잘됐네! 어서 집에 가서 교수님들한테 연락하고 지원해." 내 귀가 팔랑거려서일까, 아니면 P 같은 좋은 친구를 옆에 둬서였을까. 마감을 30분 앞두고 박사 과정 지원서를 제출했다. 합격하면 좋겠지만 합격하지 않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은 일을 했다.


런던을 떠나기 며칠 전에도 P를 만났다. 버블티 노래를 부른 나 때문에 차이나타운에 있는 버블티 가게에서 만나 차를 마셨다. 영국에서 너를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고 하자 P는 만날 인연은 다시 만나게 돼 있으니 섭섭해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그래, 만약 그날 내가 한국영화제에 늦었다고 발걸음을 돌렸다면 너를 만나지 못했겠지, 화장실에 같이 가서 차를 마시자고 주책을 부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친구가 되지 않았겠지. 친구가 될 인연은 어떻게 해서라도 만나는 법이었다. 그리고 P는 며칠 전부터 문컵으로 환승했다고 했다! 너도 해냈구나. 잘했어, 친구야.


P를 마지막으로 만난 그날도 언제나 그랬듯 런던에는 비가 왔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유기농 제품을 파는 가게에 갔다. P는 가족에게 줄 '문컵'을 샀고, 나도 친한 언니에게 선물한 새로운 문컵을 샀다. 영화제에서 문컵 때문에 시작된 우정이 돌고 돌아 다시 이곳으로 왔다. 그동안 즐거웠다며 포옹을 했다. 그리고 다시 또 보자고 했다. 그때 P가 작은 선물을 내밀었다. 유기농 재료로 만든 립밤이었다. "먹을 것을 사줄까 했지만 립밤이 더 오래가니까. 이거 쓰면서 한국 가서도 내 생각하라고." 급하게 잡은 약속인데 선물까지 챙겨 온 P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응 그래, 꼭 다시 보자. 다음에 런던 오면 연락할게." 그렇게 P는 자전거를 타고 사라졌다.


문컵의 기술 혁신은 지금도 현재 진행중. 소재가 진짜 보드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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