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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Aug 13. 2019

졸업식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얼마짜리 학위인데, 졸업식은 꼭 가야겠다고 공부를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을 먹었었다. 브리스톨의 졸업식은 애매하게도 2월 말이었다. 국제 학생들의 비자는 1월 중순에 만료가 되기 때문에 졸업식까지 불법 체류를 할 수 없어 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영국까지 올 만큼 강한 의지를 가진 비유럽인 학생만이 2월 말 졸업식에 참석했다.  


졸업식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었다. 학과에서 준비한 식전 행사와 본식 개념인 졸업식. 졸업 가운을 찾으러 학생 회관 건물에 갔더니 여기저기서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너 한국에서 날아온 거야? 아니면 영국에 계속 있었어?" 별로 친하지 않았던 동기들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어 얼싸안고 안부를 나눴다.


# 사진에 집착하는 내 친구, M


1년간 석사 과정의 고단한 여정을 마무리하는 자리여서 그런지 학과에서도 식전 행사에 큰 공을 들인 모양이었다. 과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모였던 개성 없는 우리 과 건물을 벗어나 처음으로 마당이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행사가 열린 것이다. 행사장을 보며 감탄하고 있던 내게 동기 T가 말했다. "너 여기 처음 와봐? 셜록 웨딩 에피소드 촬영 장소잖아. 몰랐어?" 그래, 몰랐다. 브리스톨에서 1년을 넘게 살며 공부했는데 그 누구도 나에게 이러한 정보를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다. 왜, 어째서, 졸업식이 돼서야 이런 고급 정보를 아는 것인가!


나는 왜! 이 건물의 존재를 몰랐던 것인가. 셜록 웨딩 에피소드의 배경이라고 한다.
귀여운 내 동기들.


친한 동기들 중에서 유난히 사진에 집착하는 남자 동기 녀석이 있었다. 여자들이 사진에 더 집착한다는 전통적인 성 고정관념을 뒤엎은 친구였다. 일찍 행사장에 도착한 M은 사진이 잘 나오는 주요 지점을 파악해 엄청난 분량의 본인 사진을 이미 찍어뒀고, 우리가 와인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와중에도 도미니카 친구 마리를 불러내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비자발적으로 M의 사진사가 된 마리를 보다 못한 포르투갈 친구 R이 한 소리를 했다. "M! 그 정도 하면 됐어. 너 진짜 내가 결혼식 때 찍은 사진보다 더 많이 찍은 거 같아ㅋㅋㅋㅋ." 뼈 있는 한 마디에 M은 마리를 풀어줬다.


사진을 향한 M의 집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제 언제 다시 이렇게 뭉치겠냐는 생각이 들어 1분 1초가 아까웠다. 졸업식 시작 전 펍에 가서 간단히 맥주나 마시며 놀자는 제안에 갑자기 M이 약속이 있다고 선방을 쳤다. R이 말했다. "졸업식에 무슨 약속이 있어? 너 가족들도 안 왔잖아." 그러자 M이 수줍게 답했다. "아.. 사실 나 전문 사진가 고용했거든. 너네 먼저 만나고 있어. 나 사진 찍고 졸업식장으로 바로 갈게!" 우리로 치면 졸업식 스냅 촬영 이쯤 되는 것 같았다. 못 말리는 녀석, 결국 우리를 버리고 M은 전문 사진가와 함께 사진을 찍으러 사라졌다.


우리끼리 펍으로 가는 도중에 졸업식장인 윌스 메모리얼 도서관 건너편에서 M과 딱 마주쳤다. M은 프로페셔널한 자세로 도서관을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우리를 본 M이 단체 사진을 찍자며 불러 세웠다. 우리 중에는 논문 제출을 연기해 코스모스 졸업을 하는 동기 T가 졸업 가운을 입지 않은 채 껴 있었다. M은 T 때문에 사진의 완성도가 낮아진다고 생각했는지 한 장을 찍은 뒤 조심스레 평상복을 입은 T에게 말했다. "T, 이번엔 우리끼리 한 번만 찍을게^^" 공손했지만 의도가 명확한 요청이었다. T는 "오 물론이지~~!"라며 쿨하게 뒤로 자리를 비켰다. (물론, 그렇게 수십 장 찍힌 사진은 졸업식이 끝난 뒤에도 받지 못했다.)


# "우리는 열심히 놀았잖아"


졸업식이 시작되자 졸업생들과 손님들이 차례로 입장했다. 원래는 런던에 사는 친구 두 명이 졸업식에 참석하기로 해 손님 티켓 2장을 예약했지만, 급한 사정이 생겨서 올 수 없게 됐고 손님 티켓을 졸업 가운을 입지 않은 T에게 넘겨 버렸다. 티켓이 없으면 졸업식장에 입장할 수 없다는 엄격한 규칙 때문에 T는 내가 아니면 졸업식장 밖에서 동기들의 졸업을 지켜볼 뻔했으나 내가 구원해준 것이다.


졸업식장.


졸업식 팸플릿에는 과별로 졸업생 명단이 적혀 있었다. 최우수 성적인 Distinction을 받은 학생들만 그 명단이 공개됐고, Merit와 Pass를 받은 졸업생들은 Master of Science라는 문장 아래 차례대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난해 졸업 때는 우리 과에서 Distinction을 받은 학생이 2 명 밖에 없다고 했으나 올해는 11명으로 늘어났다. 우리 동기들, 공부 열심히 했구나!!! 물론 내 이름은 Distinction 밑에 없었다.


팸플릿을 가만히 보던 벨기에 친구 세바스찬이 말했다. "어떻게 우리 무리에는 이사벨 말고 Distinction 받은 애들이 한 명도 없어?" 내가 답했다. "야, 우리는 그래도 열심히 놀았잖아. 우리는 fun group 이잖아!" 세바스찬의 말이 맞았다. 매일같이 뭉쳐 다니며 도서관과 펍을 오갔던 우리 중에서 공부벌레 이사벨을 제외하고 아무도 Distinction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공부 잘하는 애들 몇 명이 대표로 나가서 졸업장을 받아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기 이름이 호명되면 한 명씩 나가서 두 손을 모아 총장에게 합장(?)을 하고 졸업식을 받는 신개념이었다. 브리스톨의 전통인지, 영국 대학의 전통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 모두 총장님께 합장하고 졸업식을 받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동기 한 명은 "나 저거 싫어. 꼭 졸업장을 구걸하는 것 같잖아"라고 말했지만, 녀석도 어쩔 수 없이 전통을 따라 합장하고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식이 끝날 무렵 영국 국가인 'God Save The Queen'이 흘러나왔다. 국가가 흘러나오자마자 같은 줄에 앉아 있던 영국 친구 G가 갑자기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평소 영국 왕실 가족들을 혐오하고, 시민의 세금이 그들에게 사용된다는 것에 분노하던 친구였다. 너 아까 졸업장은 합장하고 받았잖아...


 졸업식이 끝난 뒤 근처 펍으로 갔다. 가족들과 함께 온 친구들도 여럿 있어서 가족까지 따로 저녁을 먹을 줄 알았더니 어쩌다 보니 모두가 뒤섞인 대규모 그룹이 됐다. 그렇게 모여 몇 개월 동안 흩어져 살아왔던 이야기를 나눴다. 브리스톨 시청 환경과에 공무원으로 취업한 친구, 홍보팀에 들어간 친구, 원래 하던 일 찾아 복직한 친구, 백수인 친구... 졸업 뒤 진로는 다양했다. 부모님, 아내, 두 살짜리 아들과 함께 온 R은 "이렇게 또 언제 모여서 놀겠어. 나는 오늘 막차 타고 집에 갈래"라며 가족들을 집으로 먼저 돌려보냈다. 그래, 그것이 진정한 우정이다!


5박 6일 짧은 휴가를 내 졸업식에 오길 잘했다. 1년 동안 함께 도서관에서 고생하며 에세이를 쓰고, 성적을 받고 울고 웃고, 펍에 가서 셀 수 없이 많은 맥주를 함께 마셨던 내 동기들.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에 곁에서 위로해준 이들도, 가해자를 욕하고 함께 시간을 보낸 이들도 동기들이었다. 7년간 모아둔 돈을 1년 4개월 만에 탕진해버렸지만, 대신 나는 언젠가는 써먹을 학위와 소중한 동기들을 얻었다. 내 1년을 값지게 만들어준 동기들아 고마워, 다음엔 꼭 영어로 써서 너네들도 읽을 수 있게 해 줄게. 그땐, 우리의 우정을 위해 M 이야기는 조금 편집해야겠다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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