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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Mar 25. 2019

부곡 하와이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지난 설은 영국에서 돌아온 뒤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맞이하는 명절이었다. 창원 외삼촌댁에 갔더니 부산에서 온 이종사촌 오빠 가족도 애들을 데리고 이미 도착해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 오빠네 새언니가 말했다. "아가씨도 오는 줄 알았으면 CD 구운 거 들고 오는 건데. 아쉽다. 엄마 나오는 동영상 있는데 아버님이 복원했거든."


엄마가 나오는 동영상이라니. 새언니가 말하는 엄마는 우리 엄마였고, 아버님은 이모부를 뜻했다.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내가 여섯 살이었을 때 이모, 이모부, 사촌오빠들,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부곡하와이에 여행 다녀왔던 기억이, 거대한 꽃 모양 수모가 쓰기 싫어서 엄청 짜증 냈던 기억이, 부곡하와이 야시장에서 날으는 비행기를 탔던 기억이 말이다.


우리 이모부는 그 시대의 진정한 얼리어댑터였다. 1980년대 말, 집집마다 필름 카메라는 있던 시절이었지만 비디오카메라까지 갖춘 집은 참 드물었다. 하지만 우리 이모부께서는 우리의 첫 부곡 하와이 여행에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와 1박 2일 여행을 영상으로 기록하신 것이었다.


이메일로도 받을 수 있었지만 CD든, USB든 직접 받아 동생과 함께 보고 싶었다. 사촌 오빠는 1시간 30분 분량의 편집 없는 동영상을 USB에 담아 내게 선물했다. 역시, 영상의 힘은 편집이었다.. 영화도 아닌데 1시간 반짜리 영상을 점프 없이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ㅋㅋ 그렇게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줄 알았던 약 30년 전의 여행 추억은 디지털 시대에 알맞게 복원돼 내 손에 들어왔다. 동생네 집에 가서 동생과 나, 이제 5개월이 된 조카를 내 품에 안고 같이 동영상을 재생했다. 엄마가 나오자 동생이 조카에게 말했다. "XX아, 저기 외할머니야~~."


첫 장면은 캠핑이었다. 말이 좋아 캠핑이지, 산에 은색 돗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는 게 다였다. 엄마는 생각보다 목소리가 얇았다. 영상 속에서 "수영아"라고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를 난생처음 들었다. 그리고 엄마는 예뻤다. 웃는 모습이 참 예뻤다. 꽃무늬 셔츠와 초록색 반바지를 입은 영상 속 엄마를 보고 나의 패션 취향과 비슷해 깜짝 놀랐다. 엄마가 지금까지 저 옷을 아껴뒀다면 내가 물려받는 건데... 역시 패션은 돌고 도는 거였다. 이제 30대 중반에 접어든 나와 비슷한 나이였던 엄마는 커트 머리까지 비슷했다. 네 살짜리 동생은 그 더운 날씨에도 엄마 무릎에 앉아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둘째들이란... 나는 그 옆에 시큰둥하게 앉아 숟가락으로 불고기를 퍼 먹었다. 그때까지 젓가락질을 배우지 못한 모양이다. 여섯 살의 나는 지금처럼 왼손 잡이었다. 엄마는 "그것만 먹으면 짭다. 밥이랑 같이 먹어라"며 나를 챙겼다.


우리 모두 수영을 하는데 엄마는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마도 사촌 오빠와 이모부, 이모, 우리가 수영하는 모습을 찍은 사람이 엄마였나 보다. 엄마는 카메라를 들고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를 딸들의 물놀이를 조용히 기록했다. 같이 동영상을 보고 있던 동생이 옆에서 말했다. 아빠한테 들었는데, 엄마가 암 진단을 받은 게 자기 돌 때였다고. 그런데 엄마는 동생이 네 살이 돼 부곡 하와이에서 수영을 할 때까지 우리 옆에 계셨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동생이 결혼해 엄마가 되고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XX아, 엄마한테 와~"라며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동생을 보며 나보다 '엄마'를 엄마라고 부를 수 있었던 시간이 더 짧았을 과거의 어린 동생을 생각할 때마다 안쓰러웠다. 그런 동생이 엄마가 돼 자신을 스스로 엄마라고 칭하는 모습을 보니 참 대견했다. 그래, 네가 엄마가 됐구나.


그때 그 부곡하와이는 경영난 때문에 폐업했고, 지금은 지역 사회에서 부곡 하와이 되살리기에 힘을 한창 쏟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 엄마보다 나이가 많아진 나, 엄마가 된 동생. 부곡 하와이가 꼭 다시 문을 열어서 온 가족이 다 같이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엄마가 꿈에 나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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