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이론

2025년을 맞으며

by 수리링



라틴 문화권에서는 포도 12알을 먹는 새해 풍습이 있다.



12개 포도알은 12달을 상징하고, 사람들은 자정 종소리에 맞춰 포도알을 하나씩 먹으면서 새로운 한 해의 행운을 기원한다. 최근 틱톡, 릴스에서 이른바 포도 이론(Grape Theory) 이라는 이름으로 이 풍습이 엄청나게 유행을 했고, 내 피드에도 자주 등장을 했다. 사람들이 테이블 밑에 구겨져서 포도를 입에 욱여넣으면서 낄낄대는 걸 볼 때마다 무척 즐겁고 재밌어 보였다. 찾아보니 실제로 테이블 밑에서 먹는 건 전통과는 관련이 없는데, 누군가 시작해서 하나의 밈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새해맞이에 크게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2025년 새해도 원래 자취방에서 혼자 조용하게 맞이할 계획이었다. 테이블 밑에서 포도를 먹을 생각이었는데, 장을 보러 가긴 귀찮아서 B마트로 샤인 머스캣을 시켜야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쯤 세윤이한테서 연락이 왔다. 보신각에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가자고. 세윤이는 신년 맞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구여서 그런 특별한 날을 나와 보내고 싶어 해 주는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결국 보신각에 가는 대신 우리 집에서 위스키 한잔하면서 종소리는 TV로 듣게 되긴 했지만, 덕분에 포도 메이트가 생겼다. 세윤이가 집에 있는 샤인 머스캣을 가지고 온 것이다. 포도알도 다행히 30알쯤으로 아주 넉넉해서 수월하게 2인분의 포도 먹기를 해낼 수 있었다.



알이 큰 샤인 머스캣 12개를 연속으로 먹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래도 한 알씩 열심히 욱여넣고 씹고 삼키면서 내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런저런 소망을 빌었다. 무척 대단한 것들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올해 조금 더 무탈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평범하고 무난한 것들이 더 귀하고 얻기 힘들다는 것을 갈수록 더 자주 느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윤이가 와준 덕분에 내가 릴스에서 봤던 그대로 낄낄대고 웃으면서 끝내 주는 새해맞이를 할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숙연했을 순간에 세윤이가 함께여서 기뻤다. 누군가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었다는 어떤 시처럼 우리의 소원도 서로가 함께 목격했기 때문에 정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포도알을 먹으며 열었던 2025년. 2025년의 나 자신에게는 조금 더 주변인에게 따스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기를, 뾰족한 말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둥글게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기를 당부하고 싶다. 삶은 연속적이지만 이렇게 12달 단위가 존재하는 덕분에 우리 모두 한 번씩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심사하고 숙고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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