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죽기 위해 잘 살기로 했다
나는 중년의 내 나이가 좋다.
어렸을 때 보다 사는 게 편하다.
사는 게 편하다는 말은 형편이 나아졌다는 말이 아니라, -물론 20대 사회 초년생에 비하면 그러하겠지만-세상을 보는 내 눈과 마음이 편해졌다는 말이다.
신포도 우화에 나오는 여우를 보는 내 견해가 달라진 것처럼.
사람에 대한 기대가 낮아졌다.
이것은 대단한 힘을 가진 것으로서, 기대 이상의 모습에 감동하게 되고, 기대했던 만큼, 혹은 그 이하의 모습을 본다 한들 크게 상처를 받지 않게 되었다.
작은 것에 놀라고 감동하는 삶이 덤으로 따라온다.
나에 대한 기대도 낮아졌다고 볼 수 있다.
완벽주의를 버리는 것이기도 하고, 주제 파악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것이, 인간이 얼마나 작은지, 연약한지, 동시에 잔인할 수 있는지였다. 생각보다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고, 죽기 살기로 이기심을 부릴 때 보다 ‘함께‘를 택할 때 일이 잘 풀렸다.
내가 무엇을 바꾸겠다는 것은 나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시키고 나와 함께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걸 진즉에 알았더라면 결혼생활도, 육아도 더 현명하게 해 내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던 그 시간들을 살아내었기에 나는 지금을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닐까도 싶다.
내가 연약한 존재이고 불완전함을 인정하면 겸손해진다.
이렇게 단정 짓는 자체가 겸손과 멀어지는 느낌도 있다. 많이 알 수록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은 그저 이치에 맞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황희 정승의 유명한 일화를 아마도 초등학교 때 읽었던 것 같다.
‘너도 옳고, 너도 옳다.’
이 세상에 백 프로 옳은 것, 백 프로 옳지 않은 것이 있을까.
건강 상식만 해도 어제까지 건강에 나쁘다던 음식이 오늘은 그렇지 않다고 밝혀지지 않던가. 인간은 끊임없이 탐구하고 또 쉼 없이 새로운 가설들을 쏟아내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러니 나는 가장 간단한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쏟아지는 새 정보와 지식에 휘둘리기보다는 가장 기본적인 것에 기운을 쏟기로 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기.
그래서 잘 죽기.
이 마저도 얼마나 인간적이며 유치한 바람이지 곧 깨닫게 되었다. 사람의 생과 사에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지분이 얼마나 될까. 이건 매우 인간적인 바람이라는 것. 마치 영생을 갈구했던 이들의 어리석음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한다. 나는 고작 인간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