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 쥐.
‘섹스 앤 더 시티‘ 의 주인공 캐리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었다. ‘A squirrel is just a rat with a cuter outfit!’ ‘다람쥐는 귀여운 옷을 입은 쥐’ 일뿐이라고. 센트럴파크에 비둘기만큼 흔한 다람쥐가 창가에 나타나자 한 말인데 그럴싸하다. 심지어 우리말로 다람쥐에는 ’ 쥐’가 들어 있다.
점심시간에 템즈강변으로 산책을 갔다가 공원을 가로질러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공원 초입에 들어서는데 풀숲으로 통통한 쥐가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같이 걷던 언니와 동시다발적으로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웬일이니, 엄청 컸지? 투덜거리며 공원을 가로질러 반대편 입구에 닿았다. 공원을 빠져나가려는데 풀숲에서 폴짝하고 뭔가 튀어나왔다. 다람쥐였다. 우린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같은 쥐 조상을 가졌더라도 ’좀 더 귀여운 옷‘을 입으면 대우가 달라진다. 물론 쥐와 다람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에 대해 깊이 들어갈 생각은 없다. 뿌리가 같을 뿐 사는 곳도 습성도 다르니까. 쥐들이 낮동안 숨어 지내다 밤에 등장해 창고의 곡식자루를 갉아먹다가 들켜서 빗자루 세례를 받을 때 다람쥐는 방금 전 나무에서 딴 도토리를 입에 물고 햇살 밝은 공원의 나뭇가지 위를 뛰어다닌다. 털이 풍성한 꼬리를 살랑거리며.
귀여운 모습의 다람쥐도 사실 꽤 공격적이라면 믿을까? 다람쥐의 경고음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수긍할 것 같다. 나도 처음엔 그 소리가 다람쥐에게서 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마치 까마귀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고양이 소리 같기도 하다. 아름드리 상수리나무에 대대손손 물려줘도 될 만큼 도토리가 가득 열렸어도 다람쥐들은 서로 쫓고 쫓기며 경쟁한다.
해피와 산책을 하던 눈부신 어느 날. 공원길을 걷는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다람쥐 한 마리는 나무 위에, 한 마리는 바닥에 나뒹굴어 있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다람쥐는 재차 나무를 기어오르고, 전사와 같이 지키고 있던 다람쥐는 야무지게 밀어냈다.
나무를 지키려는 자와 기어오르려는 자 사이의 전쟁이다. 꽤 높은 높이에서 떨어진 것 같은데도 그 둘은 멈추지 않고 몸싸움을 계속했다. 기어오르면 밀고, 기어오르면 쫓아냈다. 귀엽게만 보았던 다람쥐의 공격성을 처음 목격한 날이었다. 이후에 까마귀 소리로만 알았던 소리가 경고를 날리는 다람쥐의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더 이상 놀랍지 않았다.
다람쥐가 나무에 앉아있는데 그 곁을 지날 때면 녀석은 조각상처럼 굳어버린다. 마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상대의 눈에 띄지 않는다고 믿기라도 하는지 미동도 없다. 누가 이기나 내기라도 해 볼 셈으로 나도 가만히 있다가 문득 녀석이 안쓰러워 가던 길을 그냥 가고 만다.
다람쥐는 어디에 살까?
그림책을 떠올려보면 다람쥐는 커다란 나무 기둥에 난 구멍에 살 것 같다. 적어도 난 그런 줄 알았었다. 사실은 흔하디 흔한 다람쥐가 어디에 사는지 궁금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람쥐 한 마리가 내 시선을 끌었다. 꽤 키가 큰 나무를 오르고 있었다.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보고 있었는데 다람쥐는 키 큰 나무의 꼭대기까지 오르더니 바람에 너울거리는 새 둥지로 쏙 들어가는 게 아닌가. 어, 다람쥐가 왜 새 집에 가지? 나중에 남편에게 물었더니 다람쥐도 나무에 집을 짓고 산단다. 마치 새 둥지처럼 생긴 집이 다람쥐 집이었던 모양이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려서 아슬아슬하게 보였지만 아마도 그건 쓸데없는 인간의 걱정일 것이다. 나무에 집짓기 전문가인 다람쥐는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서 집을 지었을 테니.
도토리를 물어다가 자꾸 정원 곳곳에 숨겨두는 바람에 아기 도토리나무가 여기저기에 삐져나오게 만들고 새 먹으라고 세워둔 버드피더에서 땅콩을 훔쳐먹어 얄밉기도 하지만 쥐라도 퐁신한 털 옷을 입은 너는 계속 귀여워하기로 한다.